항목 ID | GC04901745 |
---|---|
한자 | 輿地圖書楊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현욱 |
저술 시기/일시 | 1757~1765년 - 『여지도서』「양주」 작성 |
---|---|
편찬 시기/일시 | 1757~1765년 - 『여지도서』「양주」 편찬 |
간행 시기/일시 | 1757~1765년 - 『여지도서』「양주」 간행 |
소장처 | 한국 교회사 연구소 - 서울특별시 중구 삼일대로 330[저동 1가 2-3] |
성격 | 고도서|읍지 |
권책 | 55책[『여지도서』] |
[정의]
도봉구를 포함하는 양주목이 수록된 조선 후기의 전국 읍지.
[개설]
『여지도서(輿地圖書)』는 1757년(영조 33)부터 1765년(영조 41) 사이에 편찬된 전국 읍지이다. 총 55책으로 313개 군현의 읍지가 수록되었다. 각 읍지 앞에는 채색 지도가 배치되어 있다.
[저자]
『여지도서』는 지방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를 묶어서 편차(編次)한 것이다.
[편찬/간행 경위]
『여지도서』의 편찬 경위는 『영조실록(英祖實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757년 8월 9일 홍문관 수찬 홍양한은 『팔도 분도첩(八道分圖帖)』을 소개하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이 오래됨으로 인하여 변화된 실상을 반영하지 못하므로 각도의 읍지를 올려 보낼 것을 청하였다. 이에 영조가 윤허하였고 『여지도서』 편찬 사업이 시작되었다. 실록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 당시 조정에서는 지방 통치에 활용할 기초 자료로서 읍지를 제작하였다.
[형태/서지]
『여지도서』는 필사본으로 각 군현의 채색 지도가 포함되어 있으며, 총 55책으로 313개의 읍지가 수록되어 있다. 현재 한국 교회사 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여지도서』「양주」의 첫머리에는 양주목 채색 지도가 배치되었다. 지도에는 현재 도봉구에 위치한 연산군 묘와 도봉 서원이 표시되어 있다. 이어지는 읍지에는 방리(方里), 총서, 건치 연혁, 군명, 관직, 형승, 산천, 성씨, 풍속, 능침, 단묘, 공해(公廨), 제언(堤堰), 창고, 물산, 교량, 역원(驛院), 목장, 관애, 봉수, 사찰, 고적, 인물, 진공, 조적, 한전, 수전, 전세, 대동, 균세, 봉름(俸廩), 군병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리 항목 앞에는 도로에 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고 방리 항목에는 각 면의 호구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도봉구인 해등촌면은 관아와 가까운 곳이 12㎞[30리], 먼 곳이 20㎞[50리] 거리에 있으며, 원호(元戶) 379호, 남자 742명, 여자 810명이 등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원에서는 양주목에 설치된 역원과 발참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녹양역(綠楊驛), 평구역(平丘驛), 연서역(延曙驛) 등의 설명을 통해 당시 양주목이 함경도, 강원도, 평안도 등의 지역으로 이어지는 교통상의 요지에 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물에서는 충신, 효자, 열녀만을 기록하고 있다. 전세 항목에서는 결총, 실결수, 아록(衙祿), 공수, 저치미(儲置米)[비상시에 대비하여 나라에서 비축하던 쌀], 결전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으며 따로 대동, 균세 항목이 설정되어 있기도 하다. 군병 항목에서는 군총만을 기록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여지도서』는 조선 후기 인문 지리지의 전형으로 후대 여러 지리지 편찬의 기준이 되었다. 후대의 『경기지(京畿誌)』, 『경기 읍지(京畿邑誌)』 등에서도 『여지도서』의 기본적 체계를 바탕으로 편찬된 것을 통해서도 『여지도서』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상업의 발달 등으로 도로망이 중시되었는데 이는 지도에 기재된 도로망 및 역원, 읍지 방리 항목에 앞서 기재된 도로 관련 내용 등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재정 관련 정책에 이용되는 자료로서 각 군현의 호구, 전세, 대동, 균세, 봉름 등의 항목이 강조된 것은 『여지도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