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6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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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道詵 |
이칭/별칭 | 옥룡자,선각국사,요공선사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169길 520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홍기승 |
[정의]
서울 도봉 지역에서 사찰을 짓고 활동한 통일 신라 말기 고승.
[개설]
도선(道詵)[827~898]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전라남도 영암(靈巖) 출신이다. 자는 옥룡자(玉龍子)·옥룡(玉龍), 호는 연기(烟起)이다. 집안의 내력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태종 무열왕의 서얼손(庶孼孫)이라는 전승으로 보아 진골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어머니는 강씨(姜氏)이다.
[활동 사항]
도선(道詵)은 15세가 되던 841년(문성왕 3)에 출가하여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처음에는 화엄종을 공부하였으나, 846년(문성왕 8)에 당(唐)에서 돌아온 혜철(惠徹)이 머물고 있던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桐裏山)의 대안사(大安寺)로 찾아가 배우고, 선종(禪宗) 승려가 되었다. 23세 때인 849년(문성왕 11)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에 전국 각지를 다니며 수행하였다. 서울에도 도선이 지었다는 사찰들이 있는데, 도봉산 원통사(圓通寺)도 그중 하나이고, 이 무렵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선은 863년(경문왕 3) 무렵에 전라남도 광양시 백계산(白鷄山)에 있던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35년 간 수행하며 수백 명의 제자를 양성하였다. 헌강왕(憲康王)이 그의 명성을 듣고 궁궐로 초빙하여 가르침을 듣기도 하였다. 도선은 898년(효공왕 2) 3월 10일에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상과 저술]
도선은 선종 승려이지만 그보다는 우리나라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체계화한 인물로 더 유명하다.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풍수적으로 좋지 못한 땅의 기운을 보완한다는 비보(裨補) 사상을 핵심으로 한다. 비보의 형태는 다양한데, 도선은 주로 비보사찰(裨補寺刹)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러한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신라 말기에 각지에서 성장하던 호족 세력의 큰 지지를 받았다. 특히 고려 태조 왕건도 도선에 영향을 받아, ‘훈요십조(訓要十條)’ 제2조에서 도선이 정한 곳 외에 함부로 사찰을 짓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왕건 이후에도 고려 시대 내내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영향을 미쳤다. 도선의 저서로는 『도선비기(道詵秘記)』,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있다고 한다. 이 중 특히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는 삼각산이 길지임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눈을 뜨고 머리를 돌려 산세(山勢)를 두루 살펴보니,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한 곳, 이곳이 바로 명당 대지(明堂大地)로다.
음(陰)과 양(陽)이 서로 맞아 겹겹이 꽂이 피니,
자손이 번창하고 국가를 수호하리라.
앞에 놓인 산들은 첩첩이 들어서서 조공 바치듯 하고
뒤로 옆으로 늘어선 산들은 부모 삼촌과 같이 보호해 주며
문 지키는 산 또 대궐문이나 성문 밖에는 개 세 마리씩 있어
주인을 위하여 충실히 문을 지키네!
좌측의 청룡과 우측의 백호가 드높다고 시비 말라.
사방의 장사꾼은 저마다 보배를 바치러 올 것이요.
명예를 탐낸 이웃 손님들 자식이 부모 따르듯이 와서
모두 다 한마음으로 나라와 임금을 도우리라.
임자(壬子)년에 첫 삽, 괭이를 대면
정사(丁巳)년에 성군이 될 왕자가 탄생할 것이다.
삼각산을 의지하여 도읍을 정하면
9년 후에는 사방에서 조공을 바칠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삼각산의 북동쪽에 있는 도봉산 역시 삼각산 명당의 영역 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부터 도봉산에 수많은 사찰이 지어지고 기도처가 되었던 것이 다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묘소]
최근 도선이 머물던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옥룡사 터를 발굴 조사하면서 도선의 부도전(浮屠殿) 터가 발견되었다. 부도가 놓였을 부도전 중심부 아래에서 석곽(石槨)으로 둘러싸인 석관(石棺)이 확인되었는데, 그 내부에는 60대 이후의 남성의 것으로 보이는 인골이 놓여 있었다. 이 인골을 도선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상훈과 추모]
옥룡사선각국사비(玉龍寺先覺國師碑)에 따르면 도선이 세상을 떠난 후에 신라 효공왕(孝恭王)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광양(光陽) 옥룡사(玉龍寺)에 세워진 그의 탑에는 ‘징성혜등(澄聖慧燈)’으로 명명(命名)하였다. 또한 박인범(朴仁範)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으나 돌에 새기지는 못했다. 이후 고려 현종(顯宗) 때 대선사(大禪師), 숙종(肅宗) 때 왕사(王師)로 추증(追贈)하였고, 인종(仁宗)은 선각국사(先覺國師)의 시호를 내렸다. 또한 1150년(의종 4)에는 왕명으로 최유청(崔惟淸)이 글을 짓고 정서(鄭叙)가 글씨를 쓴 비석을 개경(開京) 국청사(國淸寺)에 세웠다. 1172년(명종 2)에 옥룡사의 주지 지문(志文)이 비석을 옥룡사로 옮겼다. 1920년대에 비석이 유실되었으며, 2003년에 본래 자리에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