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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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 |
영어공식명칭 | Righteous Army |
이칭/별칭 | 의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영규 |
[정의]
개항기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강원도 철원과 김화 지역에서 일제에 대항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던 인물.
[개설]
강원도 지방은 한말의병(韓末義兵)의 진원지이자 웅거지였다. 철원 지역은 의병 투쟁이 두드러지지는 않았으나 1907년 정미의병(丁未義兵) 시기에 연기우(延基羽), 왕회종(王會鍾), 김진묵(金溱黙), 허위(許蔿) 등 의병장이 철원 지역에서 활약하였다.
[활동 사항]
1907년 8월 적성·마전 지역에서 활동하던 왕회종·김진묵 의병부대는 4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9월 11일 경기도·황해도·강원도의 접경지대인 삭령·토산·안협으로 북상하여, 그 지역 내 일진회원들을 처단하고 군자금을 거두는 등 기세를 떨쳤다. 그러자 금성수비대(金城守備隊) 임무를 띠고 출동한 일본군이 의병부대를 추적하였고, 왕회종·김진묵 의병부대는 안협에서 철원으로 이동하여 연천군 우편취급소장과 철원읍 우편사무원 등 일본인 거류민들을 처단하고 철원 일대를 장악하였다.
왕회종·김진묵 의병부대가 철원을 점령하자 일본군수비대 시라이[白井] 중대는 9월 24일 철원으로 진출하고, 철원 북방의 금화수비대도 병력을 차출하여 철원으로 출동하였다. 시라이 중대가 안협을 거쳐 철원으로 향하자 석교(石橋) 부근에서 기다리던 100여 명의 의병이 이들을 맞아 격돌하였고, 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자 시라이 중대는 석교마을을 모두 소각하는 만행을 저지른 후 25일 오전 철원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왕회종·김진묵 의병부대는 철원 남쪽 보개산(寶蓋山) 심원사(深源寺) 부근으로 이동하여 심원사 입구인 법화동(法化洞)에 150여 명의 경계부대를 배치하고, 주력부대는 심원사 경내에서 전열을 정비하였다. 금화수비대 역시 25일 철원에 도착하여 시라이 중대와 합세하였다.
다음날 9월 26일 새벽 법화동에 매복하여 있던 의병 경계부대가 먼저 들어오는 니시카와[西川] 중대를 기습하여 사상자 20여 명을 내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이 틈에 의병 본대는 북쪽으로 이동하였고 의병 경계부대도 니시카와 중대와 접촉을 끊고 본대를 따라 철수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수비대는 심원사에서 법화동을 거쳐 철원으로 되돌아갔는데 이때 경계부대를 기다리던 본대의 의병 250여 명은 길목인 대광리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의병 본대는 80여 명의 의병을 잃었고, 일본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왕회종과 김진묵은 분산된 의병들을 수습한 다음 화천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허위(許蔿) 의병부대가 철원 지역에서 다시 세력을 떨치자 10월 15일 금성수비대가 재차 철원에 출동하여 16일 아침 심원사에 머물던 의병부대를 추격하였다.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심원사에서 대기 중이던 허위 부대는 금성수비대가 17일 이곳에 진출하자 또 한 차례 타격을 가하고 재빨리 심원사를 탈출하여 연천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러자 금성수비대는 철원 지역 의병활동의 거점으로 활용되는 심원사를 불질러 완전히 없애 버리고 금성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