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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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育 |
이칭/별칭 | 원숙,모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홍갑 |
활동 시기/일시 | 1493년 - 이육 안기도 찰방 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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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07년 - 이육 사마시 진사과 합격 |
거주|이주지 | 이육 거주지 - 경상북도 안동군 |
거주|이주지 | 이육 이주지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 |
묘소|단소 | 묘소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 |
사당|배향지 | 추원재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 |
사당|배향지 | 원산재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고성 |
대표 관직 | 찰방 |
[정의]
조선 전기 청도 지역으로 이주한 문신.
[가계]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원숙(元淑), 호는 모헌(慕軒).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 이원(李原)이고, 아버지는 현감 이평(李泙)이며, 어머니는 허추(許樞)의 딸 숙부인 양천 허씨이다. 부인은 숙인(淑人) 흥해 최씨이다. 사림으로 이름 높았던 쌍매당 이윤(李胤)과 망헌 이주(李冑)의 아우이다.
[활동 사항]
이육(李育)[?∼?]은 고성 이씨 청도 입향조이다. 두 형 이윤과 이주를 대신해 출사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시묘 살이를 마친 후 1493년(성종 24) 문음으로 안기도 찰방(察訪)에 제수되었다.
그 후 연산군 치하에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연달아 일어나 두 형과 동생이 귀양 가고 죽는 등 참혹한 상황에 이르자, 세상을 피하고자 안동에서 청도로 내려와 유곡 죽림촌(竹林村)에 정착하였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7년(중종 2) 사마시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복거지로 삼은 청도군 유등리의 유호 연지에 군자정(君子亭)을 지어 독서와 강학을 하였다.
[학문과 저술]
두 형 이윤·이주와 함께 점필재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적인 행실 윤리를 잘 실천하여 사림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묘소]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에 있으며,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이 지은 묘비가 세워져 있다.
[상훈과 추모]
향도 사림이 강계(講契)를 모아 매년 8월 18일에 추모와 유덕(遺德)을 기리고 있다.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에 추원재(追遠齋)와 원산재(院山齋) 등의 묘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