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C01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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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미영 |
김대현(金大賢)은 1553년 부친 김농(金農)과 모친 안동권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서 1602년 숨을 거두었다. 호는 유연당(悠然堂)으로,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의 증손자이기도 하다.
김대현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면모를 보이면서 성장하였다. 당시 한양에서 살았던 그는 조선 전기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우계(牛溪) 성혼(成渾)으로부터 글을 배운 적이 있는데, 명석하고 총명해서 자주 칭찬을 듣곤 하였다. 장년이 되어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칭할 만큼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1576년, 24세 되던 해에 부친의 명을 받아 오미리의 종택을 영감댁 터에서 현재의 장소로 이건하고, 또 뒷산 죽자봉(竹子峰)에 초가를 지어 ‘죽암정사(竹巖精舍)’라고 이름 짓고는 자연을 벗 삼으면서 학문을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
이처럼 김대현은 애초부터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은 삶을 추구하였다.
1582년 30세 되던 해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친 채 고향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40세가 넘어 안동과 접해 있는 영주로 옮겨가서 집을 지은 후 ‘유연당(悠然堂)’이라 이름 짓고는 자신의 호 역시 ‘죽암’에서 ‘유연당’으로 바꾸었다. 유연당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 「음주(飮酒)」에 나오는 “채국동리하유연견남산(採菊東籬下悠然見南山: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꽃 꺾어 들고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보네)”이라는 시구에서 취한 글자이다.
김대현은 유연당에 머물며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을 쏟으면서 자녀들의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왔다. 그러는 가운데 자녀를 훈육하는 가훈(家訓)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을 사람 된 근본도리로 삼고 마음가짐과 몸가짐은 예법에 맞게 하고 모든 일 처리를 빈틈없이 철저히 하며 바른 도리를 실천하라.
바른 마음을 근본으로 삼아 신체를 잘 보전하고 학업에 정진하고 재능에 알맞도록 일자리를 마련하여 질투하지 말고 욕심 부리지 마라.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태도를 항상 기르고 참되고 인자한 마음으로 덕성을 길러 사람다운 행실을 삶의 근본으로 삼고 아홉 가지 생각[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과 세 가지 경계[少年女色, 壯年鬪爭, 老年利慾]를 잘 지키도록 하라.
김대현은 슬하에 아들 9형제를 두었는데, 8남 김술조(金述祖)는 1611년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혼인도 하기 전인 1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8형제는 모두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그 가운데 5형제(김봉조·김영조·김연조·김응조·김숭조)가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는 이들 가문을 ‘팔련오계(八蓮五桂)’라고 칭하면서, 오미(五美)라는 마을이름을 하사하였다.
또한 경상감사에게 마을 어귀에 ‘봉황려(鳳凰閭)’라는 문을 세우도록 명했는데, 현재 봉황려는 전하지 않고 유래를 적은 기념비가 서 있다. 인조가 봉황려를 마을 어귀에 세우도록 한 까닭은, 예부터 길조로 여겨 온 봉황은 새끼를 낳으면 반드시 9마리를 낳는 것에 비유한 것으로, 즉 김대현의 아들 9형제를 길조인 봉황의 9마리 새끼에 비유했던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대현은 향병을 모집하여 맞서는 등, 비록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나 나라를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적극 임했다. 이듬해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난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영주에 위치한 자신의 집 앞에 장막을 설치하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식량을 제공하는가 하면, 천연두에 걸린 백성들을 일일이 간호하며 극진히 보살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그야말로 한갓 이론에 머물지 않고 일상적 삶에서 실천을 펼치는 선비의 참된 모습이었다.
이러한 그의 덕행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여러 차례 벼슬을 권유받았으나, 그때마다 응하지 않다가 1595년에는 성현도(省峴道)의 찰방으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성현도는 왜군이 쉽게 드나드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황폐화의 정도가 극히 참담한 실정이었다. 이에 김대현은 자신의 녹봉을 털면서까지 굶주린 백성들을 돌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1601년에 김대현은 산음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이곳에서도 자신의 녹봉을 털어 허물어진 향교를 재건하여 젊은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했는가 하면, 향교 증축식을 개최하는 날 70세 이상 노인들을 초청하여 양로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봄, 잠시 여가를 내어 고향인 오미리에 있는 조상들의 묘소에 성묘를 하고 돌아와 병석에 눕게 되었다. 김대현은 스스로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는, 여러 지인에게 삶을 정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관사 뒷산에서 큰 바위 하나가 굴러내려 강물에 떨어졌다. 이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불길한 징조라고 입을 모았는데, 며칠 후 김대현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향년 50세였다.
김대현이 산음 관사에서 눈을 감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인조는 이듬해인 1603년 그의 제사에 몸소 제문(祭文)을 지어 약간의 제물과 함께 내려 보냈다.
[사제문(賜祭文)]
국왕은 예조좌랑 이척연을 보내어 졸(卒) 산음 현감 증이조참판 김대현의 혼령에 제(祭)를 지내오니, 청렴으로 정사에 종사하니 백성들이 어질다고 칭찬하고. 그 덕을 후손에 물려주니 모두가 의로운 가르침을 잘 따랐도다.
두씨(竇氏)의 오룡(五龍)처럼 다섯 아들이 대과에 급제하니, 다만 훌륭한 자제들만이 나라의 광채일 뿐 아니로다.
그 부모에게 은혜를 내리는 것은 국법에 따라 나온 바이요, 질직(秩職)은 이조참판을 내리니 이러한 대우는 태상부(太常府)에서 나옴이라. 관리를 보내어 의식을 이루게 하니 좋은 복을 내리소서
이후 김대현은 향촌 유림의 공의(公議)를 거쳐 불천위로 추대 받고, 현재 허백당 종택 사당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아들 8형제와 함께 추원사에 주향(主享)되어 있으며, 영주의 구호서원(鷗湖書院)에 배향되어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