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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75
한자 許曄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7년연표보기 - 허엽 출생
몰년 시기/일시 1580년연표보기 - 허엽 사망
거주|이주지 허엽 거주지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사당|배향지 화곡 서원(花谷書院) - 황해북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양천(陽川)
대표 관직 부제학

[정의]

조선 전기 포천 지역에 거주하였던 문신이자 성리학자.

[가계]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 고조할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충무위 호군(忠武衛護軍)을 지내고 병조 참판에 추증된 허추(許樞)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성균관 전적을 지내고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된 허갈(許葛)이며, 할아버지는 금화사 별제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된 허담(許聃)이다. 아버지는 군자감 부 봉사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된 허한(許澣)이고, 어머니는 정부인에 추증된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돈령부 판관 성도(成燾)의 딸이다.

부인 정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서평군(西平君) 한숙창(韓叔昌)의 딸로 선수광록사소경(宣授光祿寺少卿) 좌의정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의 후손이다. 재취 부인 정부인은 강릉 김씨(江陵金氏)로 예조판서 김광철(金光轍)의 딸로, 신라 명원군왕(溟源郡王)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이다. 아들은 셋을 두었는데 허성(許筬), 허봉(許篈), 허균(許筠)이다. 딸은 둘로 그중 한 명이 허초희(許楚姬)[허난설헌(許蘭雪軒)]이다.

[활동 사항]

허엽(許曄)[1517~1580]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었다가 나중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서 수학하였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에 이르렀다. 1551년(명종 6) 부교리를 거쳐, 1553년(명종 8)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그 뒤 사헌부 장령으로 재직 중 재물을 탐하였다 하여 파면되었다. 1559년(명종 14) 필선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성균관 대사성·지제교를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됐다.

1562년(명종 17) 경연장에서 명종에게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죽은 조광조(趙光祖)의 복권을 건의하였고, 윤근수(尹根壽)·구수담(具壽聃)·허자(許磁) 등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파직을 당하였다.

한편, 허엽이 이조좌랑에 재직할 때에 자기를 천거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원망을 품은 이감(李戡)이, 마침 허엽의 종가(宗家)가 불에 타서 다시 짓게 되자 의심스러운 흔적을 찾아내 허엽을 몰아붙였다. 이에 대사헌 윤춘년(尹春年)이 그 말을 믿고 허엽을 탄핵하려 하자 어떤 사람이 윤춘년에게 “허엽이 짓는 것은 종가이다. 의심스러운 흔적을 가지고 논박한다면 한지원(韓智源)과 심전(沈銓)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니, 윤춘년이 “한지원과 심전은 참으로 죄가 있다 하겠거니와, 허엽은 사림의 명망을 받고 있으니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또 “그렇다면 명망이 있는 자만을 다스리고,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할 자들은 그대로 내버려 둔단 말인가?”라고 하니 윤춘년이 대답을 못하여 허엽은 처벌을 모면하였다.

1563년(명종 18)에도 이양(李樑), 이감 등의 탄핵을 받을 뻔하였으나 심의겸(沈義謙)의 사주를 받은 홍문관 부제학 기대항(奇大恒)이 이들을 탄핵하여 위기를 넘겼다. 한편, 허엽은 처가인 강원도 강릉에서 나는 특이한 맛의 샘물로 두부를 담가서 먹었는데, 그 맛이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허엽이 그 두부를 상품화하면서 초당 두부의 기원이 된다. 그러나 선비로서 장사를 한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선조 즉위 초 신진 사류의 한 사람인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거침없는 발언과 비판에 염증을 느낀 사람 중에 허엽도 있었다. 원로대신 가운데 허엽과 이준경(李浚慶) 등은 이이를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특히 이이서경덕(徐敬德)은 도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하고, 이황의 이기 이원론(理氣二元論)을 정면 부정하여 이기 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하자 이이를 극도로 혐오하게 되었다.

1575년(선조 7년) 동인과 서인 사이에 당쟁이 일어나자 김효원(金孝元)·이발(李潑) 등과 함께 동인의 지도자로 활약하였고, 이어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그 뒤 관직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한 도산 서원(陶山書院) 건립을 지원하였고, 향약(鄕約)의 실시를 건의하는 등 주자학의 보급에 힘쓰기도 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초당집(草堂集)』과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이 있다. 일찍이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경민편(警民編)』을 보충하기도 하였으며 『삼강이륜행실(三綱二倫行實)』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 2리 산61번지에 있다. 허엽의 묘표 앞면은 양사언(楊士彦), 뒷면은 한호(韓濩)의 글씨이다. 특히 비석의 중간이 부러진 것을 이었는데, 이는 아들 허균이 역모로 능지처참되자 아버지의 묘까지 그 화를 당한 흔적이다. 묘표의 뒷면에 허균의 이름이 지워져 있다. 묘표 옆에는 후실이며 허균의 어머니인 강릉 김씨 묘표가 서 있으나 봉분은 없다.

[상훈과 추모]

청백리에 등록되었고, 개성 화곡 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신도비는 1582년(선조 15) 세워졌는데, 노수신(盧守愼)이 찬하고 한호(韓濩)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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