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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69
한자 趙成夏
이칭/별칭 순소(舜韶), 소하(小荷)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5년연표보기 - 조성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60년 - 조성하 사용 제수
몰년 시기/일시 1881년연표보기 - 조성하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81년 - 조성하 문헌 시호 받음
부임|활동지 평안도 관찰사 - 평안남도·평안북도
묘소|단소 조성하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성격 문인
성별
본관 풍양(豊壤)
대표 관직 이조 판서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순소(舜韶), 호는 소하(小荷). 고조할아버지는 조엄(趙曮)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조진관(趙鎭寬)이다. 할아버지는 조만영(趙萬永)이며, 아버지는 조병준(趙秉駿)이다. 조병구(趙秉龜)에게 입양되었다. 추존 왕인 익종(翼宗)의 비인 신정 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의 친정 조카이다. 첫 부인은 이호준(李鎬俊)의 딸인 우봉 이씨(牛峰李氏)이고, 둘째 부인은 박내보(朴來輔)의 딸인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조성하(趙成夏)[1845~1881]는 1860년(철종 11) 신정 왕후에게 문안하러 갔다가 사용(司勇)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 9월 구일제(九日製)라고 하는 국제(菊製)에서 제2등으로 발탁되었다. 1861년(철종 12)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862년(철종 13) 규장각 대교에 제수되었다.

1863년(철종 14) 홍문관의 부수찬과 응교 및 사헌부 집의, 의정부 검상, 사복시정과 훈련도감 종사관을 역임하였다. 1864년(고종 1) 특명으로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고, 계속해서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을 비롯해 이조와 호조·예조·형조·공조의 참의를 지냈으며, 첨지중추부사와 돈령부 도정을 지냈다.

1865년(고종 2) 양모(養母)인 안동 김씨 상을 당해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1868년(고종 5) 출사해 직제학과 동지경연사 및 이조와 형조의 참판, 동지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동지의금부사, 부총관, 한성부 우윤, 활인서와 제용감 제거 등을 역임하였다. 1874년(고종 11) 특명으로 평안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부임 후 토호들의 폐단을 뿌리 뽑고 약한 사람들을 도왔고, 고과를 신중하게 하였으며, 선발을 공평하게 하였다. 또한 병기를 수선하고 자모 산성을 중수하였다.

1876년(고종 13) 일본이 개항을 요청하며 군함으로 침공해 오자, “국가가 위급한데 어찌 좌시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돈 1만 냥과 양곡 1,000석을 마련하여 병조에 보냈다. 그 해 겨울 지경연사로 발탁되어 중앙으로 소환되었다. 이어 예조 판서, 공조 판서, 지의금부사, 정부 유사당상, 세자시강원 우부빈객, 내의원 제조, 승문원 제조, 빙고 제조를 역임하였다. 1879년(고종 16) 지중추부사로서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판의금부사에 제수되고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881년(고종 18) 의정부 좌참찬과 홍문관 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사령을 받기 전에 죽었다. 이때 나이 겨우 37세였다.

[학문과 저술]

조성하가 1865년(고종 2)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면서 적은 기행문·시·일기를 편집하여 만든 책인 『금강산기(金剛山記)』가 전한다. 이 책은 서두에 조두순(趙斗淳)의 「풍산유록서(楓山遊錄序)」가 있고‚ 작자의 「금강산기(金剛山記」와 「동유시(東遊詩)」·「유금강일표(遊金剛日表」에 이어 끝에 정원용(鄭元容)과 윤정현(尹定鉉)·박도빈(朴道彬)·민규호(閔奎鎬)의 발문이 있다.

「금강산기」는 단발령(斷髮嶺)을 거쳐 장안사를 지나 금강산 각 곳의 명소를 유람한 후 영동의 고성·간성·양양·강릉 지방의 명승지를 보고 적은 기행문이다. 「동유시」는 여행 과정에서 느낀 심정·감흥을 읊은 시를 모은 것으로 모두 82편이 실려 있다. 「유금강일표」는 1865년 7월 26일 서울 혜화문을 출발하여 9월 8일 서울에 돌아오기까지 43일간의 기행 일기이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에 있다. 묘표는 홍문관 제학 한장석(韓章錫)이 찬술하였고, 음기(陰記)는 규장각 제학 조영하(趙寧夏)가 썼으며, 전면 대자는 아들 조동면(趙東冕)이 썼다.

[상훈과 추모]

조성하의 사망 소식을 접한 고종이 “이 중신은 단정한 자태와 근신하는 법도를 유지하며 나라를 생각하는 정성이 우뚝하였으나 포부를 실현하지 못한 채 부고(訃告)가 갑자기 닥쳐왔으니 마음이 몹시 서글퍼서 어떻게 형용할 수 없다.”고 하면서 왕실에서 사용하던 관곽을 내려주었고, 장례에 사용되는 물품을 해당 부서에서 지급하도록 하였다. 1881년(고종 18) 3월 7일 문헌(文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3월 9일 이를 기념하는 연시연(延諡宴)이 행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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