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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67
한자 趙東冕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7년연표보기 - 조동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83년 - 조동면 별시 문과 급제
묘소|단소 조동면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풍양(豊壤)
대표 관직 성균관 대사성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 묘가 있는 개항기 문신.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 증조할아버지는 풍은 부원군 조만영(趙萬永)이고, 할아버지는 판서 조병준(趙秉駿)이다. 아버지는 이조 판서 조성하(趙成夏)이며, 아들은 참봉 조명구(趙命九)이다.

[활동 사항]

조동면(趙東冕)[1867~?]은 1883년(고종 20) 교관으로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1885년(고종 22) 이조참의·성균관 대사성·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규장각 직제학을 거쳐 1887년(고종 24) 부호군으로 참의 내무 부사(參議內務府事)를 거쳐 시강원 겸보덕에 임명되었다. 1888년(고종 25)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특별히 발탁되었다가 다시 이조참판을 지내고 외직으로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 1889년(고종 26) 경기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이 해 경기도 연해의 각 읍에 흉년이 들자 중앙에 계(啓)를 올려 진자(賑資)를 요청하는 등 기민 구휼에 힘썼으며, 대왕대비 전옥 책문(大王大妃殿玉册文)의 서사관(書寫官)도 맡아 보았다.

1890년(고종 27) 안성에서 민요가 발생하자 의정부에 계를 올려 탐학으로 민요를 일으킨 안성 군수 최낙주(崔洛周)를 유배시키도록 하였다. 강화 유수로 자리를 옮겨 대왕대비의 병이 위중하자 협판 내무 부사(協辦內務府事)로 별입직(別入直)하였고, 대왕대비가 죽은 뒤에는 종척집사(宗戚執事)·신백서상자(神帛書上字)·행장서사관(行狀書寫官)·향관(享官) 등을 맡았으며, 장례 문제와 관련하여 시원임각신(時原任閣臣)의 연차(聯箚)에 참여하였다. 1892년(고종 29) 가자(加資)되었고, 상호도감(上號都監)의 익종대왕 옥책문(翼宗大王玉册文) 서사관으로 활동하였다. 1893년(고종 30) 형조판서·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의정부의 우참찬·좌참찬 등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궁내부 특진관으로 칙임관)이 되었고, 빈전 제거(殯殿提擧)도 맡았다. 1896년(고종 33) 칙임관 3등이 되고 혼전향관(魂殿享官)·경연원 시강 등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국장도감(國葬都監)·산릉도감(山陵都監)·빈전도감(殯殿都監) 등의 제조를 지내고 그 공로로 가자되었으며, 태의원경(太醫院卿)에도 임명되었다.

1898년(고종 35) 궁내부 특진관으로서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奎章閣學士兼侍講院日講官)이 되고, 칙임관 3등이 주어졌다. 그 후 다시 특진관이 되었다가 이듬 해 시종원경(侍從院卿)을 맡아 대왕대비 악장문(大王大妃樂章文)의 제술관(製述官)으로도 활약하였다. 1900년(고종 37) 궁내부 특진관과 함께 칙임관 2등이 주어지고, 장례원 경(掌禮院卿)·귀족원 경(貴族院卿)·홍문관 학사 등을 역임하였다. 1901년(고종 38)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판돈령 원사(判敦寧院事)·양지아문 총재관(量地衙門總裁官) 등을 지내고, 칙임관 2등이 되었으며, 정익황후 악장문(貞翼皇后樂章文)의 제술관도 맡았다. 1902년(고종 39) 궁내부 특진관을 거쳐 의정부 찬정 등을 역임하고 칙임관 1등이 주어졌으며, 이 해 의정부 의정 윤용선(尹容善) 등과 함께 이용익(李容翊)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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