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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51
한자 李淸烈
이칭/별칭 소주(小洲)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상성북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변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7년연표보기 - 이청열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40년연표보기 - 이청열 사망
출생지 이청열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상성북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고성(固城)
대표 관직 중추원 의관

[정의]

개항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개설]

본관은 고성(固城). 호는 소주(小洲)이다.

[활동 사항]

이청열(李淸烈)[1847~1940]은 1871년(고종 8) 음보로 별군직(別軍職)을 제수 받았다. 1873년(고종 10) 친시(親試)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를 제수 받았다. 이후 판관, 첨정, 선전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중추부첨지 겸 사복시정에 제수되었다. 1876년(고종 13) 함안 군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암행어사 이정래(李正來)가 추천하여 포상을 받았다.

1882년(고종 19) 청산진 첨사로 있을 때 큰 공을 세워 만인산(萬人傘)을 하사 받았으며, 청산진을 떠난 뒤에는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주었다. 1892년(고종 29) 방어사가 되었고, 1894년(고종 31) 선유사로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1894년(광무 1)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점이 시작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왔고, 포천군 서면 신읍리[현 신읍동 호병골]에 서당을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이** "나는 주인을 잃고 길을 잃었는데 너는 주인을 알아보고 반가워 하니 네가 나보다 더 훌륭하다."하니 모인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숙연해 하였다.
1906년 최익현공이 대마도에서 순국하자 1907년 이청열공이 주도하여 유림들과 함께 사당인 채산사를 건립하여 현재도 해마다 제향을 모시고 있다.
  • 답변
  • 디지털포천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4.10.10
이** 면암 최익현선생이 일본 강점이 시작되자 칼을 들고 의병을 모을 때 이청열공은 붓을 들고 후세 교육에 힘을 쏟아 강성한 후예들을 양성해서 나라를 받드는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고향에 서당을 세웠다. 어느날 군민들에게 알려 넓은 장소에 모이게 한 후 나귀를 매어놓은 나무밑에 멍석을 깔고 절을 하면서 201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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