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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42
한자 李時術
이칭/별칭 사강(士强)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병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06년연표보기 - 이시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30년 - 이시술 진사시 합격하고 천거로 세자익위사 세마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48년 - 이시술 형조 정랑·공조 정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2년 - 이시술 증광 문과 병과 급제한 뒤 성균관 직강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5년 - 이시술 정언·사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5년 - 이시술 형조 참의·우부승지·대사간·병조 참지·이조 참의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6년 - 이시술 헌납·필선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7년 - 이시술 수찬·부교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8년 - 이시술 교리·보덕·사간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9년 - 이시술 부수찬·교리 제수. 서장관으로 사은 정사 홍득기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660년 - 이시술 부응교·의주 부윤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67년 - 이시술 대사간·이조 참의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68년 - 이시술 철원 부사 등 거쳐 가선대부에 오름
활동 시기/일시 1669년 - 이시술 병조 참판·이조 참판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71년연표보기 - 이시술 사망
묘소|단소 이시술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계류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경주(慶州)
대표 관직 이조 참판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강(士强). 증조할아버지는 참찬 이몽량(李夢亮)이고 증조할머니는 현감 최윤(崔崙)의 딸인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다. 할아버지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고, 할머니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딸이며, 아버지는 예빈시 정 이정남(李井男)이다. 부인은 참판 홍영(洪霙)의 딸인 풍산 홍씨(豊山洪氏)이다.

[활동 사항]

이시술(李時術)[1606~1671]은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세자익위사 세마가 되었다. 이후 내시교관·공조좌랑을 역임하였고, 1648년(인조 26) 형조 정랑·공조정랑을 지냈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1652년(효종 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다. 1655년(효종 6) 정언·사서를 거쳐 이듬해 헌납·필선을 역임한 뒤 1657년(효종 8) 수찬·부교리를 지냈다. 1658년(효종 9) 교리·보덕·사간을 지낸 뒤 이듬해 부수찬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이 해 현종이 즉위하자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사은 정사 홍득기(洪得箕)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660년(현종 1) 부응교를 거쳐 의주 부윤으로 나갔다. 재임 중에는 문묘를 증수하고 매월 삭망례(朔望禮)를 올렸으며, 인재들을 향교에 모아 학문에 힘쓰도록 격려하였다. 그런데 1662년(현종 3) 의주 백성이 국경을 넘어 청나라 지역에 들어가 벌목하는 과정에서 체포된 사건, 즉 월경 범법(越境犯法) 사건이 발생하였다. 청나라는 이 사건을 묵과할 수 없는 큰 문제로 삼고, 격렬한 항의와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 정부에 책임 관장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당시 의주 부윤이던 그는 일생의 최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시술의 죄가 없음을 확인하고 구제할 계책을 의논하였다. 마침내 국왕은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형조판서 허적(許積) 등에게 특지를 내려 직접 청나라 사신에게 양해를 구하도록 하였다. 한편 가족 친지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그의 구명을 호소하였다. 이때 그는 오직 “생과 사는 하늘이 정하는 바에 따를 뿐 인력으로 좌우할 수 없다.”고 하며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태도를 보였다.

1665년(현종 6) 형조참의·우부승지·대사간을 거쳐 병조참지·이조참의를 지냈다. 1667년(현종 8) 대사간·이조참의를 역임한 뒤 이듬해 철원 부사 등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에 올랐다. 1669년(현종 10) 병조참판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참판으로 전직되었다. 1671년(현종 12) 병을 얻어 경기도 성남의 옛집에서 사망하였다. 실록에 “사람됨이 선량하고 근신함을 스스로 지켜 나가 관직에 임하고 사물을 접할 때 잘못한 적이 없다.”고 적어 그의 인품과 재능을 높게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계류리에 있다. 묘갈명은 좌의정 박세채(朴世采)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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