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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16
한자 兪得一
이칭/별칭 영숙(寧叔)/귀와(歸窩)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병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50년연표보기 - 유득일 출생
몰년 시기/일시 1712년연표보기 - 유득일 사망
출생지 유득일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묘소|단소 유득일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창원(昌原)
대표 관직 병조판서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영숙(寧叔), 호는 귀와(歸窩). 증조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유용(柳溶)이고, 할아버지는 첨정 유여해(柳汝諧)이며, 아버지는 개성부 유수를 지낸 유창(柳瑒)이다. 외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이척연(李惕然)이다. 부인은 이유(李秞)의 딸이다. 형제로 유신일(兪信一), 유회일(兪晦一), 유집일(兪集一) 등이 있다.

[활동 사항]

유득일(柳得一)[1650~1712]은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용호동에서 출생하였다.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으로, 1675년(숙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677년(숙종 3)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보임되었다. 1682년(숙종 8) 사헌부 지평에 올랐고, 이듬해 서인의 과격파인 김익훈(金益勳)이 남인 제거를 목적으로 모반설을 조작하자 서인의 소장파로서 그 간계를 폭로하고 처벌을 주장하다가 진도 군수로 좌천되었다가 곧 파직되었다. 얼마 안 있어 사간원의 정언(正言)으로 복귀하였고,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홍문관 교리로 승진하였다.

1694년(숙종 20) 홍문관 수찬으로 옮겼다가 사헌부 집의, 의정부 검상 및 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그해 8월 인현 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되어 왕비로 책봉한 사실을 청나라에게 알리기 위해 효종의 사위인 금평위 박필성(朴弼成)을 정사(正使), 오도일(吳道一)을 부사로 임명하여 사절단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을 다녀왔다.

1695년(숙종 21) 승지를 거쳐 대사간으로 발탁되었고, 이듬해 다시 승지에 제수되고 사헌부 장령을 거쳐 대사간에 다시 올랐다. 1697년(숙종 23)부터 1701년(숙종 27)까지 강원도 관찰사, 전라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함경도 관찰사로 재직 중에 소금이 부족한 삼수(三水) 및 갑산(甲山)의 백성에게 공급할 방안과 개시(開市)의 각종 폐단 개선책 등을 건의하였다.

1703년(숙종 29)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그해 9월 이조참판으로 옮겼고,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으로 발탁된 후 6월에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어 한성부 판윤을 거쳐 병조판서가 되어 이정청 당상(釐整廳堂上)을 겸임하고 군정(軍政)을 쇄신하고자 노력하였다. 1706년(숙종 32)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공조판서로 전직하고, 10월에 형조판서를 지냈다. 1708년(숙종 34) 다시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다가 9월에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고 호조판서로 옮겼다. 1710년(숙종 36)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가 곧 대사헌으로 전직하였다. 5월에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는데, 자신의 부인을 죽인 이만운(李萬運)의 송사(訟事)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는 죄인 처남 심일령(沈一寧)의 격고(擊鼓)로 파직되었다. 이후 벼슬에 복귀하지 못하고 1712년(숙종 38)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연행일기초(燕行日記草)』가 있다. 이 책은 1694년 인현 왕후가 복위되어 왕비로 책봉한 사실을 청나라에게 알리기 위한 사절단에 서장관으로 참여하여 연경에서 보고 경험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해 8월 2일 서울을 출발하여 9월 28일 연경의 대불사(大佛寺)에 도착해 5~6일간 머무는 동안의 일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고사와 관련한 지명 유래, 연혁에 대한 설명도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용호동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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