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기자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974
한자 奇自獻
이칭/별칭 사정(士靖),만전(晩全)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신채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7년연표보기 - 기자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0년 - 기자헌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1년 - 기자헌 사가독서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기자헌 예문관 봉교 겸설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기자헌 이조좌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4년 - 기자헌 사간원 정언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기자헌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599년 - 기자헌 강원도 관찰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0년 - 기자헌 사헌부 대사헌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0년 - 기자헌 홍문관 부제학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1년 - 기자헌 경기 관찰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1년 - 기자헌 예조참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1년 - 기자헌 이조참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2년 - 기자헌 병조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2년 - 기자헌 세자우부빈객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3년 - 기자헌 이조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4년 - 기자헌 좌의정 제수(1604년)
활동 시기/일시 1608년 - 기자헌 좌의정 제수(1608년)
활동 시기/일시 1608년 - 기자헌 행판중추부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14년 - 기자헌 영의정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17년 - 기자헌 폐모론에 반대하다 홍원에 유배
활동 시기/일시 1618년 - 기자헌 강릉에 이배
활동 시기/일시 1618년 - 기자헌 길주에 정배
활동 시기/일시 1620년 - 기자헌 덕평 부원군에 봉해짐
활동 시기/일시 1620년 - 기자헌 사면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기자헌 인조반정으로 중도부처
몰년 시기/일시 1624년연표보기 - 기자헌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27년 - 기자헌 관작 회복
출생지 기자헌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유배|이배지 기자헌 유배지 - 함경남도 홍원군
유배|이배지 기자헌 정배지 - 함경북도 길주군
유배|이배지 기자헌 이배지 - 강원도 강릉시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행주(幸州)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사정(士靖). 호는 만전(晩全). 증조할아버지는 응교(應敎) 기준(奇遵)[1492~1521]이고, 할아버지는 한성 부윤을 지낸 기대항(奇大恒)[1519~1564]이다. 아버지는 기응세(奇應世)이며, 어머니는 우찬성 임백령(林百齡)[?~1546]의 딸인 선산 임씨(善山林氏)이다.

[활동 사항]

기자헌(奇自獻)[1567~1624]은 1582년(선조 15) 성균관에 입학했고,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형인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과 동방이었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검열이 되었다. 기자헌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와 함께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1537~161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선조 25) 예문관 봉교 겸설서, 병조좌랑, 이조좌랑을 거쳐 정언, 집의, 성균관 직강, 홍문관 부교리, 사인,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승지가 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어머니의 제삿날이라 동대문 밖에 나갔다가, 선조가 피난 간다는 소문을 듣고 황급히 달려가서 호종하여 5월 13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왜구가 화평을 청해 오자 조정에서는 의론이 분분하여 혹은 강계를 혹은 평양을 사수하자고 하고 혹은 함흥으로 옮기자는 등 혼란하였다. 이때 기자헌선조에게 아뢰기를, “만약 서쪽으로 간다면 평양보다 못하고, 만약 화평을 의논하면 또 적을 불러들일 우려가 있으니 당분간 평양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하니 선조가 이를 따랐다. 그리고 각처에서 올라오는 장계를 이호민(李好閔)과 더불어 기록해서 후일에 대비하였다.

1597년(선조 30) 호조 참판으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599년(선조 32) 강원도 관찰사, 이듬해 부제학·대사헌이 되었다. 1601년(선조 34)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은 최영경(崔永慶)[1529~1590]을 신원(伸寃)하고, 당시 옥사를 다스린 서인을 탄핵해 실각시켰다.

1602년[선조 35] 왕세자[광해군]의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서 『맹자(孟子)』를 강의하였다. 이어 병조판서와 예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1604년(선조 37) 우의정이 되어 사임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다음 해 좌의정에 올랐다. 이때 선조가 세자를 폐하고 계비 인목 왕후(仁穆王后) 소생인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1606년(선조 39) 좌의정을 12번이나 사임한 끝에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유영경(柳永慶)[1550~1608] 등의 소북파가 영창 대군을 옹립하려고 하자 이를 탄핵하고 광해군을 즉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영중추부사가 되었고, 1612년(광해군 4) 계축옥사가 발생하자 사의를 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 5) 영창 대군의 외조부 김제남(金悌男) 등이 역모를 꾸민다는 무고가 있자 광해군이 직접 김제남을 심문하여 죽이고 영창 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 당시 영창 대군 피살의 부당함을 주장한 정온(鄭蘊)[1569~1641]이 극형을 받게 되자 강력히 반대해 유배에 그치게 하였다. 그리고 임금에게 글을 올려 설득하였고, 강릉으로 물러가 모든 관직에서 사퇴할 것을 청했지만 1614년(광해군 6) 영의정에 올랐다.

1617년(광해군 9) 폐모론이 일어나자 옳지 못하다고 간언하다 문외출송(門外黜送)되고 함경남도 홍원에 유배되었다. 이후 함경북도 길주로 이배되었으며 풀려 나와 강릉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광해군의 특지로 덕평 부원군(德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끝내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김유(金瑬)·이귀(李貴)[1557~1633] 등이 모의 가담을 요청했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또한 반정 후에 인조가 신하를 등용할 때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 해 7월 역모 죄로 한양에 압송되어 중도 부처되었다. 그 후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을 우려해 옥에 갇힌 사람 모두와 함께 처형되고 일족도 몰살당하였다. 그의 나이 58세 때였다.

[묘소]

묘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는데, 최근 경기도 안성의 흘니곡(屹泥谷)에서 묘석을 발견한 후 시제사를 지냈다. 이후 경기도 포천시에서 발견된 『견성지(堅城誌)』에서 기자헌의 묘소는 석문령(石門嶺)에 있다고 하고, 석문령 일대가 행주 기씨의 조상 묘소가 있는 선영인 것으로 알려지긴 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상훈과 추모]

1627년(인조 5) 이원익(李元翼)[1547~1634]과 이귀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묘비명은 근래에 황주(黃州) 변시연(邊時淵)이 썼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