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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신북면사무소 터 3·1 운동 만세 시위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878
한자 -新北面事務所-三一運動萬歲示威址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889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도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연표보기 - 옛 신북면사무소 터 3·1 운동 만세 시위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30일연표보기 - 옛 신북면사무소 터 3·1 운동 만세 시위 종료
소재지 옛 신북면사무소 터 3·1 운동 만세 시위지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889 일대지도보기
성격 만세 시위지

[정의]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 있는 3·1 운동 당시 신북면민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

[변천]

1919년 3월 29일 중면 신사리의 유중식은 2통의 통문을 받았다. 그 내용은 “내일 신북면사무소 앞에 군중이 모여 만세를 부르고자 하니 여러 사람과 같이 나오라”는 일종의 사발통문이었다. 유중식은 독립 만세를 부른다는 통문 내용에 찬성하여 동리 사람을 모아 놓고 “지금 사발통문이 돌고 있으니 3월 30일에 신북면사무소로 가서 만세를 부르자”고 하였다. 그리고 함병현(咸炳鉉)·김수종(金秀鍾)에게 동리마다 사발통문의 내용을 알리게 하여 만세 시위 계획을 널리 선전하였다.

3월 30일 신북면사무소 앞에 유중식함병현을 비롯하여 사발통문을 보고 온 사람이 1,000여 명이나 되었다. 그중 어느 학생 차림의 청년이 “여러분, 우리나라는 독립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이 우리를 원조하고 있소”라며 연설을 하였다. 뒤이어 누군가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여기에 호응하여 군중이 만세를 불렀다. 만세 시위가 폭력 시위로 양상이 바뀌었으며, 일제 경찰이 발포하여 4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격렬하게 변모해 갔다. 시위운동 후에 유중식함병현 등은 밀고에 의해 체포되어 유중식은 징역 1년 형, 함병현은 징역 10개월 형에 각각 처해졌다.

[위치]

옛 신북면사무소 터 3·1 운동 만세 시위지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889번지 일대이다. 『현대사 자료』25에 관련 사실이 기재되어 있고, 이원용[최익현 숭모 사업회 사무국장]의 증언에 의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현황]

원형이 멸실되어 포천 소방서 신북 지역대 및 기지리 마을 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신북면사무소 3·1 만세 시위는 치밀한 사전 계획에 의해 진행된 만세 운동이었다. 또한 이 시위에 거의 전 군민이 참여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면서도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평가된다. 신북면 만세 시위는 규모면에서 포천의 3·1 운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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