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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751
한자 朗善君墓-神道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 산18-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637년 - 낭선군 이우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693년 - 낭선군 이우 사망
조성 시기/일시 1701년연표보기 - 낭선군 묘 신도비 건립
현 소재지 낭선군 묘 및 신도비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 산18-1
성격 묘|신도비
양식 원형 봉분 합장묘
관련 인물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1637~1693]|인흥군(仁興君)
봉분 크기/묘역 면적 봉분 높이 2m|둘레 18.8m

[정의]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에 있는 조선 후기 종실이자 서화가 낭선군 이우의 묘와 신도비.

[개설]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1637~1693]의 자는 석경(碩卿)이고, 호는 관란정(觀瀾亭)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선조의 12남인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이고, 어머니는 중종의 부마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의 현손녀이자 군수(郡守) 송희업(宋熙業)의 딸인 여산 군부인(礪山郡夫人) 송씨(宋氏)이다. 부인은 증 판서 성운한(成雲翰)의 딸인 창녕 군부인(昌寧郡夫人) 성씨(成氏)와 증 판서 이세미(李世美)의 딸인 성산 군부인(星山郡夫人) 이씨(李氏)이다.

1651년(효종 2) 15세 때 낭선정(朗善正)에 봉해졌다가 후에 군(君)으로 승습되었다. 1662년에 7조(七朝)의 어필(御筆)을 모사하여 간행하였고, 그 공으로 숭헌대부(崇憲大夫)가 되었다. 이듬해 진위 무진 향정사(陳慰撫進香正使)로서 청나라에 갔다가 뇌물로 4,000금을 사통한 죄로 귀국한 뒤 삭직되었다가 복권되었다. 1671년(현종 12) 문안사(問安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74년에 인선 대비(仁宣大妃)가 별세하자 수릉관(守陵官)을 지냈으며, 1686년(숙종 12)에는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87년 만수전(萬壽殿)에 화재가 발생하여 왕보(王寶)가 불타자 왕명을 받들어 다시 썼으며, 이듬해 장렬 왕후(莊烈王后)가 별세하자 명정과 지문을 썼고, 다시 종친부 유사당상을 역임하였다. 다음 해에 『열성 어해집(烈聖御解集)』을 편집하여 종부시 제조와 감수가 되었다. 1690년(숙종 16) 왕명으로 『선원보(璿源譜)』를 태백산에 장치(藏置)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시호는 효민(孝敏)이며, 문학과 행실에 돈독하였다.

낭선군 이우는 서예와 묵란(墨蘭)·묵죽(墨竹)에 능하였다. 특히 서적을 수집하여 각첩(刻帖)을 만드는 등 우리나라 서법사(書法史)와 금석사(金石史)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역대 왕의 글씨를 모아 조각한 『열성 어필첩(列聖御筆帖)』과 명사들의 글씨를 모아 『관란정첩(觀瀾亭帖)』을 만들었으며, 서법의 이론서로 『임지 설림(臨池說林)』을 쓰고, 전국의 금석문을 수집하여 『대동 금석첩(大東金石帖)』을 만들었다. 이우의 글씨는 보은 법주사(法住寺) 벽암 대사비(碧巖大師碑)와 강진 백련사 사적비(白蓮寺事蹟碑) 등이 남아 있다.

[위치]

국도 43호선을 따라 포천시 영중면에서 38휴게소 방향으로 가다가 오른쪽 능원 낚시터 쪽으로 약 500m 들어가면 낚시터 뒤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주소지는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 산18-1번지이다. 낭선군 묘역은 인흥군 묘 및 신도비에서 남쪽으로 인접해 있다.

[형태]

묘는 주위에는 전축 기와지붕의 곡담을 둘렀고, 봉분은 원형 단분으로 높이 2m, 둘레 18.8m이며 호석이 둘러져 있다. 곡담이 둘러진 사각형 봉분 앞에 있는 묘표는 대좌가 화강암이고, 비신은 대리석인데 153×44×62㎝의 규모이며, 옥개석은 보주가 올려져 있다. 또 혼유석과 고석[북석] 위에 올려진 상석이 있는데, 규모는 155×97×35㎝이다. 그리고 ‘왕손지릉(王孫之陵)’이라는 향로석이 있고, 장대석의 단상 아래에는 명문이 새겨진 높이 220㎝ 규모의 망주석과 양석(羊石) 각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금석문]

봉분 앞에 있는 묘표는 전면에 ‘왕손 현록대부 낭선군 우 지묘(王孫顯祿大夫朗善君俁之墓)’라고 되어 있고, 향로석에도 ‘왕손지릉’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묘역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귀부와 비신, 옥개석으로 이루어졌다. 귀부의 규모는 270×170×100㎝이고, 비신은 대리석으로 규모는 167×75×30㎝이다. 옥개석에는 기와골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신도비는 ‘숭정 기원 무진 후 칠십사 년(崇禎紀元戊辰後七十四年)’인 1701년(숙종 27)에 건립하였다. 비문은 영중추부사 남구만(南九萬)이 짓고 글씨를 썼으며, 판돈녕부사 최석정(崔錫鼎)이 전액(篆額)하였다.

[의의와 평가]

낭선군 묘 및 신도비가 위치한 지역은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의 탑동(塔洞)이라는 곳으로 낭선군의 아버지인 인흥군 묘가 있어서 능원(陵園)이라고도 한다. 이곳에는 인흥군 묘낭선군 묘, 낭선군의 계자인 전평군(全坪君) 이곽(李漷) 묘 등 모두 3대의 묘가 모여 있는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더욱이 낭선군은 서예에 매우 능하였기 때문에 이곳에는 그가 쓴 다양한 형태의 묘비가 남아 있다. 특히 능원의 남쪽으로 약 250m 떨어진 입구에는 1685년(숙종 11)경에 묘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인흥군 묘계 비(仁興君墓界碑)가 있다.

인흥군 묘계 비는 4각의 대좌, 정사각형의 비신, 옥개석, 연꽃 봉우리 형태의 보주로 이루어져 있다. 묘계 비의 사면에는 여러 가지 서체로 국왕자 묘소(國王子墓所)를 알리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서편에는 ‘영평 치동 양문 탑동(永平治東梁文塔洞)’이라는 묘의 위치가 새겨져 있다. 인흥군 묘계 비는 인흥군 비가 아니라 묘지 경계에 세워 묘역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당시 한자를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려고 세운 일종의 경고문 형식의 금표(禁標)이다.

특히 북면 하단에는 20자 5행의 한글 고어체가 명문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서울시 노원구의 ‘한글 영비(靈碑)’, 진주 의곡사(義谷寺) ‘한글 비’, 문경 조령의 ‘산불 됴심비’와 함께 현재 우리나라에 단 4기밖에 없는 한글 고비(古碑)로서 한글의 변화와 의미의 변천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높은 금석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4.03 내용 수정 [개설] 1661년(효종 2) → 1651년(효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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