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749
한자 金昌翕墓-墓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 산2-2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653년 - 김창흡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722년 - 김창흡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연표보기 -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 산2-24번지로 요산단 이전
개축 시기/일시 1994년연표보기 - 김창흡 묘 및 묘비 정비
현 소재지 김창흡 묘 및 묘비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 산2-24지도보기
성격 묘|묘비
양식 원형 단분 합장묘
관련 인물 김창흡(金昌翕)[1653~1722]|경주 이씨(慶州 李氏)
봉분 크기/묘역 면적 전체 높이 약 188㎝, 묘역 면적 약 66.12㎡[20평]

[정의]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김창흡의 묘와 묘비.

[개설]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자는 자익(子益)이고, 호는 삼연(三淵)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이고, 동중추(同中樞) 김광찬(金光燦)의 손자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 羅氏)로 해주 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형은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과 예조 판서 등을 지낸 김창협(金昌協)이다.

[위치]

포천 시내에서 국도 87호선을 따라 신북면 방향으로 가다가 포천 병원을 지나면 왼쪽에 예비군 훈련장이 있는데, 예비군 훈련장 뒤쪽 언덕의 정상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주소지는 포천시 신읍동 산2-24번지이다.

[변천]

묘역은 1994년 이후에 대대적인 정비를 시행하여 봉분에 호석을 둘렀으며, 1단을 쌓아 봉분과 상석을 구분하였는데, 상석은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묘비의 오른쪽에는 단기(檀紀) 4327년, 즉 1994년 10월에 새롭게 세운 비가 있다.

[형태]

묘역은 부인 경주 이씨(慶州 李氏)와 단분 합장으로 전체 높이 약 188㎝인 봉분은 원형으로 호석을 둘렀다. 묘역은 2단으로 나뉘어 위쪽에는 봉분·묘비·새로운 비가 있으며, 아래쪽에는 상석·향로석·망주석 2기를 갖추고 있다. 묘비는 기단과 비신, 옥개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96×70×30㎝이고, 비신은 55×118×28㎝이고, 옥개석은 99×37×69㎝이다. 그리고 묘비의 오른쪽에는 단기(檀紀) 4327년, 즉 서기 1994년 10월에 새롭게 세운 비가 있다. 묘역 면적은 약 66.12㎡[20평]이다.

[금석문]

비문은 앞면에 세로로 3행이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부터 ‘유인 경주 이씨 부 유명 조선 삼연 선생 김공 창흡 지묘(孺人慶州李氏祔 有明朝鮮三淵先生 金公昌翕之墓)’라고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김창흡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로 중형인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특히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주기설(主氣說)을 절충한 김창협과 같은 경향을 취하였다. 포천의 유림들은 이러한 김창흡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사당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향(祭享)을 지냈다. 문중의 기록에 의하면 헌종 때 요산 영당을 세웠고, 1850년(철종 1)에 사액(賜額)되었다고 한다.

요영 영당은 일설에는 ‘요산사(堯山祠)’였다고 하는데, 1868년(고종 5)에 흥선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포천의 유림들은 영당이 있던 자리에 단(壇)을 만들어 ‘요산단(堯山壇)’이라 하고 제사를 지내 오고 있다. 본래 요산단포천시 신읍동 요골 뒷산에 있었는데, 1987년 5월에 현재의 위치인 김창흡의 묘소 아래로 옮겼다. 이곳은 요산 영당이 있었던 자리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