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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746
한자 權悰墓-墓碣
이칭/별칭 권종 묘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의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554년 - 권종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592년 - 권종 사망
조성 시기/일시 1601년연표보기 - 권종 묘 및 묘갈, 충신각, 충신 정문 건립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6년 4월연표보기 - 권종 묘 및 묘갈 단국 대학교 사학과에서 발굴 조사 시작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8년 9월연표보기 - 권종 묘 및 묘갈 단국 대학교 사학과에서 발굴 조사 종료
현 소재지 권종 묘 및 묘갈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
성격 묘|묘갈
관련 인물 권종(權悰)[1554~1592]
봉분 크기/묘역 면적 묘역 면적 0.84㎡

[정의]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권종의 묘와 묘갈.

[개설]

권종(權悰)[1554~1592]은 임진왜란 당시 금산 군수로 있으면서, 왜적을 만나 접전하던 끝에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이때 권종은 왕이 계신 북쪽을 향해 크게 절하고 “내 조국은, 내 조국은……” 하고 부르짖으며 죽어 갔다고 한다. 후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는 탄식과 애도를 표하였고, 충신 정려(忠臣旌閭)를 명해 충신각과 충신 정문을 세웠다.

권종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희안(希顔)이며, 찬성사파의 후손으로 중림 찰방의 아들이다. 천거되어 개형 현감이 된 후 여러 군현의 수령을 지냈는데, 어느 곳에서나 청렴하고 신중하다는 평을 들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에 금산 군수로 부임하여 국난에 대처할 것을 기약하였다. 먼저 군사를 이끌고 전주에 도착하였으나, 관찰사가 권종이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그가 거느리고 있던 군사를 빼앗아 방찰 조방 양진에 이속시키고 군량 관리의 임무를 맡게 하였다.

6월 20일 왜적이 금산군에 이르자 그곳으로 돌아가 200명도 되지 않는 군사를 거느리고 약간의 역졸을 거느리고 있던 제원 찰방 이극강과 합세하여 적을 기다렸다. 6월 22일 왜적이 대거 내습하자 하루 종일 대전하였으며, 다음 날 격전 끝에 아들 권준과 함께 순국하였다. 금산에 순의비가 세워졌다. 묘지명은 이조가 지었다.

[위치]

권종 묘 및 묘갈포천시 소흘면 고모리에 있다.

[형태]

372×381㎝ 규모의 방형 기단 위에 170×225㎝의 규모로 맞배지붕 홑처마에 방풍판을 달은 충신각을 설치하였다. 충신각 내부에 충신 정문이 소재하고 있다. 충신문은 높이 231㎝이며 230×40㎝의 현판에 자경 8㎝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묘역 면적은 0.84㎡이다.

[금석문]

금석문은 금산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충민(忠愍)이란 시호가 내려졌다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忠臣 贈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行通訓大夫 錦山郡守 贈諡忠恕 公權倧 文門 宣廟朝 贈織肅廟朝賜諡命旌 上之 三十二年 壬辰 四月 日 立].

권종의 묘갈은 다음과 같다. “權悰 墓碣 [前面] 貞夫人鎭川林氏 祔左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諡忠 敏公行通訓大夫錦山郡守權公悰之墓 公諱悰字希顔安東兼人太師孝之後文忠公近之六世孫曾祖 贈左贊成僑祖 贈領議政勣察訪軹以公宣武原從 推恩贈贊成妣密陽朴氏 贈參判偃之 女擧孝廉筮任屡典郡邑以淸愼公勤稱壬辰三月除錦山守五月倭寇犯京簡郡 兵勤王到公山爲巡察沮其行奪其軍不得遂其志以運粮差員往礪山六月卄 日聞寇郡境疾馳還任收聚軍粮若于約濟原察訪李克絅並得驛卒卄二日合 戰于郡北卄三日午後以毒瘧疾作不能軍連曰負國遂歿事 聞贈執義後 錄勳 贈吏曹判書至 肅廟朝贈謚忠愍旌其閭 配鎭川林氏學生孝宗之女一男晛 贈贊成側室二子暻隨李廷馣守延安有功晙公隨公戰死贊成四男文科 判書縉次武科折衝綵次 贈承旨紞次主簿緖一女同知金光燧承旨二子長郡 守佾次監司修爲判書后主簿一子庶尹偉舊碑折破今茲改建 玄孫 頎 撰 五代孫 尙書 崇禎紀元後 八十二年 月 日 立.”

[현황]

권종 묘 및 권종 묘갈에 대해 1996년 4월~1998년 9월 단국 대학교 사학과에서 발굴 조사를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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