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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700
한자 草堂集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간행 시기/일시 1865년 이후연표보기 - 『초당집』 간행
소장처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6-1
성격 문헌|전적
저자 허엽(許曄)
권책 1책
규격 19.5×14.3㎝

[정의]

1865년 이후 간행된, 포천 지역에 우거했던 학자이자 문신인 허엽의 시문집.

[저자]

허엽(許曄)[1517~1580]은 조선 전기 포천에 우거했던 학자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 아버지는 군자감 부봉사 허한(許瀚)이고, 아들은 허봉(許篈)과 허균(許筠)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고, 장령으로 있을 때 재물을 탐한 죄로 파직되었다가 1559년(명종 14) 필선으로 서용되고, 대사성에 이르렀다. 1562년(명종 17) 지제교를 겸하였을 때 박계현(朴啓賢)과 왕의 소명을 받고 옥취정(玉翠亭)에 들어가 율시(律詩)로 화답하였으며, 경연에 참석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청하고 허자(許磁)·구수담(具壽聃)의 무죄를 논하다가 파직되었다.

1563년(명종 18) 삼척 부사로 서용되었으나 과격한 언론 때문에 다시 파직되었고, 1568년(선조 1)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향약의 설치·시행을 건의하였다. 1575년(선조 8)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동지중추부사의 한직(閒職)에 전임되었다가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허엽의 시문은 정사본(淨寫本)의 형태로 남아 있는데, 서발(序跋) 등이 없어 『초당집(草堂集)』의 편찬이나 서사(書寫) 경위 등을 알 수 없다. 그런데 13판 오른쪽 면 제1행에 실린 「제일재이선생문(祭一齋李先生文)」[일재는 이항의 호]의 각주에 ‘증시문경(贈諡文敬)’이라 하였는데, 이항(李恒)이 증시(贈諡)된 시기는 1865년(고종 2)으로, 이 자료의 필사 시기도 그 이후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형태/서지]

불분권 1책의 필사본으로, 크기는 19.5×14.3㎝이다.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목록·원집·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당집』에는 시 12제가 연대순으로 실려 있다. 이 중 「기성정이동고관찰(箕城呈李東皐觀察)」은 평양에서 관찰사 이준경(李浚慶)에게 올린 시로, 허균의 『국조시산(國朝詩刪)』에도 실려 있는데 권필(權韠)은 ‘말을 놀리는 솜씨가 체를 얻었다[戱語得體]’고 평을 하였다. 「중흥사제등월축(重興寺題燈月軸)」은 1540년(중종 35) 겨울에 심수경(沈守慶)·윤결(尹潔)과 함께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할 때 지은 것이다. 서(序)에는 「송로과회서(送盧寡悔序)」·「장음정유고서(長吟亭遺稿序)」, 설(說)에는 「송이준설(送李浚說)」, 기(記)에는 「옥산서원기(玉山書院記)」가 있다. 부록에는 신도비명[노수신], 행장[정구], 「동은시화(峒隱詩話)」 등이 실려 있다. 척록(摭錄)[여러 전하는 자료를 모아 기록한 문서나 책]은 『견한잡록(遣閒雜錄)』·『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식소록(識小錄)』 등 여러 자료에서 허엽과 관련된 기록을 뽑은 것이다.

[의의와 평가]

동인과 서인이 대립할 때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동인의 영수로 활동했던 허엽의 정치·사회에 대한 이해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지만, 양이 충분치 못하여 한계가 있다. 하지만 척록에 실린 자료들은 저자에 대한 후대의 평가로 저자의 생애와 학문 세계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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