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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585
한자 抱川民間人集團犧牲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계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10월 09일연표보기 - 포천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 1차 발생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1년 01월 03일연표보기 - 포천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 2차 발생
발생|시작 장소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발생|시작 장소 경기도 포천군 포천면
종결 장소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종결 장소 경기도 포천군 포천면
성격 민간인 학살 사건

[정의]

1950년 인민군을 도운 부역 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기도 포천군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

[개설]

19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 1951년 1·4 후퇴 직전까지 포천 지역 주민들이 인민군을 도운 부역 혐의자 및 부역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과 학도의용대 등에 집단 처형되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인민 위원회 간부거나, 인민 위원회 일을 도왔던 사람의 가족 또는 친척이었다. 이 가운데는 아동과 여성, 노인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경과]

포천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에 대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포천면김산이, 유인태 일가 희생사건

인민군 점령기 포천면 선단리에서도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토지 분배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50년 12월 20일경 선단리 주민 유인태의 부친(이름 불명)과 김봉용이 경찰에게 연행되어 포천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전쟁 전부터 구장이었던 유인태의 부친은 인민군 점령기에도 리(里) 인민위원회 일을 계속하였다는 이유로, 그리고 김봉용은 그의 심부름을 했다는 이유로 연행되었다. 김봉용은 하루 동안 조사를 받은 후 다음 날 오후에 석방되어 집에 오는 도중에 친척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다시 치안대원 조범용에게 끌려가 총살되었다. 김봉용이 끌려가는 모습은 마을 주민들에게 목격되었는데, 당시 김봉용은 “형님, 경찰서에서도 죄가 없다며 풀어줬는데, 왜 이러느냐?”라고 하면서 조범용에게 항의를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김봉용이 희생된 장소를 찾을 수 없어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다.

김봉용이 희생된 뒤인 1951년 1월 1일경 김봉용의 부친 김산이가 치안대 조범용에게 끌려가 설운리진설모루 다리 밑에서 총격을 받았는데, 현장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신청인 김순배는 총상을 당해 집에 온 부친 김산이를 목격했는데, 당시 김산이는 추위에 떨고 있었고, 엉덩이와 머리 등 세 군데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치명상은 아니어서 생명에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김산이는 피를 닦고 출혈을 멈추는 치료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김산이의 생존 사실을 알게 된 청년단원 2명에게 다시 끌려가 마을에서 500여m 떨어진 뒷산에서 총살당했다.

총살 후 시신은 참고인 김덕만의 부친 외 마을 주민 1명이 매장을 하였다. 김산이가 다시 끌려간 후 김순배는 총살현장의 구덩이를 팠다는 김덕만의 부친으로부터 부친 김산이가 마을 뒷산에서 총살을 당했으며, “땅이 얼어서 깊이 파지 못했다”라는 말을 들었으나 무서워서 시신을 수습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참고인 김덕만은 사건 당시 김순배의 집 앞에서 피가 깔려 있는 모습을 목격하였는데 그 피가 김산이가 흘린 것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그 뒤 1951년 1월 3일경 포천면의 주민들이 피난을 가던 중 치안대 조범용이 김산이․김봉용의 가족인 윤씨, 김정수, 김복란, 김용배, 김순배, 김순례, 김종숙 등 7명과 유인태, 유인한 등 유씨네 가족 등 12명을 부르며, “빨갱이 가족들은 이리로 서라”라고 한 후, 도민증을 준다며 피난 길 중간인 설운리 하천변인 진설모루 다리 밑으로 끌고 내려갔다. 이들이 총살당하는 장면은 이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가던 김순배의 친구 김덕만이 직접 목격하였다.

2) 신북면 가채리이용성 희생사건

진실규명대상자 이용성은 전쟁 전부터 가채리 구장이었으며 인민군 점령기에도 구장을 계속 보았는데, 이 때문에 국군 수복 후 부역혐의를 받았다. 9․28 수복 후 1950년 10월 9일경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이용성과 그의 아들 이충의 등 신북면 각 리의 주민들이 치안대에 의해 비행장 공사에 나오라는 명분으로 소집당했다. 당시 가채리에서는 이용성, 이충의 외에 소집당한 주민은 없었다. 주민을 소집한 치안대는 사전에 입수한 정보를 기초로 이들 중 이용성 등 30여 명을 선별하여 무럭고개 골짜기로 끌고 가 총살하였다. 당신 선별과정에서 이용성의 아들 이충의는 풀려나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참고인 이일우는 이용성이 끌려가는 모습을 본 그 날 저녁에 총소리를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황노순은 시숙 이용성과 조카 이충의가 소집되어 나가는 모습을 목격하였는데, 누군가로부터 시신을 수습해 가라는 연락을 받은 이용성의 동생들이 밤에 무럭고개로 가서 총상으로 피투성이가 된 시신을 가져와 희생자의 밭에 수습했다고 진술하였다.

[결과]

본 사건에 대하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포천 지역 주민들이 9․28 수복 후부터 1․4 후퇴 직전까지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포천경찰서와 그 지휘를 받았던 민간치안조직[의용경찰대, 학도의용대, 의혈대 등]에 의해 포천 소흘면 설운리진설모루 다리, 신북면무럭고개 등에서 집단살해당한 사실이 확인 혹은 추정되었다.

포천군 포천면에서는 1․4 후퇴를 앞두고 선단리 주민 김봉용, 김산이가 치안대에게 끌려가 총살당했으며, 1․4 후퇴 중인 1951년 1월 3일경 김봉용 일가족 7명(윤씨, 김정수, 김복란, 김용배, 김순배, 김순례, 김종숙)과 인민위원회 간부였던 유씨(이름 불명) 집안 2가족 12명(유인태, 유인한 외 10명)이 설운리 진설모루마을 다리밑에서 총격을 받아 김순배를 제외한 18명은 모두 사망하였다.

포천 신북면에서는 1950년 10월 9일경 가채리 구장 이용성 등 30여 명의 신북면 주민들이 호병골 비행장 공사장에 소집되었다가 무럭고개 골짜기에서 집단 희생당했다.

포천 지역의 신청 사건 희생자는 김산이(金山伊), 윤씨(尹氏), 김봉용(金鳳龍), 김정수(金丁洙), 김복란(金福蘭), 김용배(金龍倍), 김순례(金順禮), 김종숙(金鍾淑), 이용성(李龍成) 등 9명이며, 미신청 사건 희생자는 유인태, 유인한 등 2명이다.

이 사건의 가해 주체는 각 경찰서에 소속된 경찰관과 그 지휘를 받는 민간치안조직[의용경찰대, 학도의용대, 의혈대 등]이었다. 연행할 부역혐의자의 명단은 각 경찰서 사찰계에서 작성하였으며, 체포 및 연행은 민간치안조직에서 담당하였다. 잡혀 온 주민들에 대한 조사는 경찰서 사찰계에서 담당하였으며 사찰계의 의견에 따라 경찰서장이 총살여부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총살의 집행은 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이 하거나 경찰관의 입회 아래 민간치안조직이 하였다. 따라서 가해책임은 가평․포천 각 경찰서와 경기도경찰국에 있으며 공권력의 불법행사를 막지 못했던 정부에게까지 그 책임이 귀속된다.

부역혐의자에 대한 가해행위는 고의적이었으며 위법한 것이었다. 당시 경찰은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을 연행할 때부터, 취조에 의한 A, B, C 등급 구분과 관계없이 총살될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로 총살과정에서 등급구분은 형식에 그쳤고, 결국 미성년 어린이까지 희생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해행위는 당시 포고되었던 「비상사태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의 적법 절차를 위반한 것이었으며, 더구나 미성년 어린이를 포함하여 그의 가족들을 희생시킨 것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인 생명권과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행위로 법적 근거도 없었을 뿐 아니라 어떠한 이유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반인권적․반인륜적 범죄이다.

[의의와 평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관계자는 “경찰은 부역 혐의 주민들을 가담 정도에 따라 A, B, C 등급으로 나눴지만 실제로는 등급 구분 없이 총살했다”며 “재판도 없이 총살한 행위는 당시 ‘비상 사태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 조치령’을 위반한 것으로 헌법에 명시된 생명권과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한 반인륜 범죄”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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