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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575
한자 義兵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계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 구한말 의병 운동 전개 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 - 구한말 의병 운동 전개 종료

[정의]

구한말~일제 강점기 초 경기도 포천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의병 운동.

[개설]

경기도 포천지역은 구한말 의병 운동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경기도 포천 출신인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黙) 등 화서 학파의 위정척사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최익현은 을사늑약 이후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대마도에서 순국한 이후 전국의 의병 운동을 고무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 의병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907년 7월 군대 해산 이후였다. 특히 이은찬(李殷瓚)·연기우(延基羽)·강기동(姜基東)·김연성(金演性) 등이 의병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은찬은 1907년 8월 관동 창의진을 결성하고 1908년 12월부터 1909년 2월까지 가장 활발하게 의병 전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경기도 포천군 지역에서 헌병 분견소를 공격하는가 하면, 일동면 기산리·유동리, 이동면 노곡리, 내동면 오림리·무림리와 양주군 등지에서 토벌군과 적극적인 교전을 벌였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유격전을 펼쳐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이때 경기도 포천 출신의 윤태산(尹泰山), 이백원(李白元), 이사인(李思仁), 김순복(金順福) 등이 이은찬의 의병 부대에서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연기우는 2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송우리 일대에서 일본 헌병을 습격하여 수 명을 사살했으며 일동면에서도 일본 헌병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와 더불어 군자금 모집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당시 포천 출신의 박복인(朴福仁)이 일본군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헌병 보조원 출신의 강기동(姜基東)은 의병을 일으켜 주로 경기도 양주·포천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 강기동은 이은찬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해 6월 격문을 띄워 병사를 모우고 지속적인 대일 투쟁을 맹세하였다. 이어 1908년 10월 경기도 포천군을 근거지로 양주·가평 등지에서 1910년 2월까지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이때 포천 출신의 조삼룡(趙三龍)·윤응원(尹應元)·권승묵(權承黙)·김복길(金福吉) 등이 강기동 의병 부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들은 이은찬의 의병 부대와는 달리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게릴라전을 통한 보급 투쟁에 주력하였다.

김연성은 1907년 12월 의병 4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포천군 서면 왕방산에 출동하여 기습 작전을 벌였다. 김연성은 연기우·강기동 의병 부대와 함께 1909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에도 불구하고 1911년까지 20~30명의 소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경기도 포천 지역의 산악 지대를 근거로 끈질긴 항전을 계속하였다. 당시 김연성의 의병 부대에서 활동하던 포천 출신의 유문재(柳文在)가 일본군에 피체 되어 옥고를 치렀다.

[포천 지역 의병 운동의 특징]

경기도 포천지역 의병 운동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은찬은 1908년 10월 윤인순·정용대·김교성 등과 연합하여 ‘경기 북부 연합 의병’을 결성하여 독자적인 구역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둘째, 의병들은 산악을 근거지로 삼아 10~30명으로 편성된 소부대 중심으로 기민한 유격전을 펼쳐 일본군을 타격하곤 했다. 셋째, 의병은 주로 농민층과 해산 군인으로 구성되었지만 행상인, 상인, 헌병 보조원 등도 참가했다. 지주나 부호로부터 군자금과 군량미 확보, 밀정이나 일진회원 처단, 일본 헌병대와 수비대 및 경찰서 습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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