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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531
한자 梁文驛
이칭/별칭 양문역(梁門驛)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할 지역 양문역 - 경기도 포천시

[정의]

조선 전기 포천 지역에 있었던 교통 통신 기관.

[제정 경위 및 목적]

역(驛)은 왕래하는 관료나 사신들을 접대하고 공문서를 전달하며 관수 물자를 운반하던 교통 통신 기관이었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영평현 역원조(驛院條)에서 양문역(梁文驛)에 대해 “현 동쪽 9리에 있다. 항간에서 독흘이라 부르는데, 양골이 와전된 것인 듯하다[在縣東九里 俗號獨訖 疑梁骨之訛]”라고 하였다. 또한 성현(成俔)의 문집인 『허백당 문집(虛白堂文集)』 권5에 수록된 ‘양문역기(梁文驛記)’는 윤지(尹漬)가 중수한 것을 기려 성현이 찬술한 글이다. 이 밖에도 양문역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비롯한 각종 지리지나 지도 등에서도 간략하나마 언급하고 있다.

[내용]

양문역은 조선 시대 경기도 영평 지역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으로, 현의 동쪽 9리 정도에 위치하였다. 1479년(성종 10) 10월에 국왕이 이곳에 머물기도 하였다. 성현이 지은 ‘양문역기’에 따르면, 이곳에서 상인뿐 아니라 관리들이 비나 추위를 만났을 때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는데, 관사가 쇠락해서 머무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 말이 갖추어지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걱정을 한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은 여진족의 왕래로 소요가 적지 않다고 하였다. 이렇게 황폐해진 역사를 1491년(성종 21) 윤지가 찰방으로 부임한 뒤 사람과 비용 등을 모아 대청(大廳)과 동·서 마루, 누고(樓庫), 말의 축사 등을 개축함으로써 하루아침에 모습이 새로워졌다고 하였다.

[변천]

양문역은 1424년(세종 6)에 양주(楊州) 녹양역(綠楊驛)과 포천 안기역(安奇驛) 등 9개 역과 하나로 묶어 은계도(銀溪道)라 하면서 찰방을 설치하였다. 이후 1465년(세조 11)에 녹양역과 안기역·양문역을 평구도(平丘道)로 이관하였다가 1471년(성종 2) 예전대로 은계도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 후기 『여지도서』에 따르면, 대마(大馬) 3필, 중마(中馬) 4필, 하마(下馬) 3필을 보유하고 있으며, 역리(驛吏) 47명과 노(奴) 49명, 비(婢) 56명이 배속되었다. 『해동지도(海東地圖)』 등의 고지도를 보면 인근에 역촌(驛村)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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