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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026
한자 政治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포천시
집필자 정진각

[정의]

경기도 포천시에서 지역민을 통해 획득한 권력을 행사하여 지역 발전을 도모하는 총체적 활동.

[개설]

현대적인 의미에서 한국의 정치는 해방 후 대의제를 근간으로 자유 민주주의가 형성된 이후를 의미하며, 포천의 정치 역시 제1공화국의 등장 이후 지역 중앙 정치와 지역 내적인 지방 자치의 결합으로 전개되고 있다.

[변천]

1.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

해방과 함께 한반도는 미·소 양국에 의해 3·8선이 획정되고 이를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하여 점령하였다. 경기도 포천 지역은 이러한 분단의 고통을 크게 받은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포천의 이동면, 영북면, 청산면 일대가 북한 지역에 속하게 됨으로써 나라뿐만 아니라 지역까지 분단되었다. 6·25 전쟁 이후 수복 지구가 되기도 했으나 휴전선에 인접한 관계로 군사 주둔 지역으로 변모되고 이후 오늘날까지 포천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한국 민주당은 1945년 9월 16일 원세훈(元世薰)의 조선 민족당, 백남훈(白南薰)의 한국 국민당, 서상일의 국민 대회 준비회, 이인(李仁)·조병옥(趙炳玉)의 연합군 환영 준비 위원회 등 우익 진영이 조직한 정당이다. 중경 임시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으나,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이승만(李承晩)을 대통령에 추대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권력에서 배제하자 이후로 한국 민주당은 반 이승만 노선을 걸었고, 1949년 대한 국민회와 대동 청년단 세력을 규합하여 민주 국민당으로 개편하였다. 당시 한국 민주당 포천군당 위원장은 서정희(徐廷禧), 부위원장은 김인봉(金仁鳳)이었으며, 1948년 실시된 제헌 의원 선거에서 서정희가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9년 2월 한국 민주당을 중심으로 신익희 세력의 대한 국민회와 지청천 세력의 대동 청년단이 합당하여 민주 국민당을 창당하고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였다. 민주 국민당은 1955년 9월 민주당으로 재출범할 때까지 이승만과 자유당을 견제한 한국 정당 사상 최초의 야당이었다. 1950년 실시된 2대 국회 의원 선거 때 서정희와 장석화가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하고 무소속의 윤성순(尹珹淳)이 당선되었다.

1951년 8월부터 자유당의 창당이 시작되었으나 원내외에서 두 갈래로 추진되어 12월에 각기 별개의 자유당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1952년 지방 의회 선거에서 원외 자유당이 압승하고 ‘발췌 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로 개정한 헌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1953년 4월 원내 자유당이 원외 자유당에 흡수되었다. 자유당 포천군당의 군 당부(郡黨部)는 각 면에 면 당부(面黨部)를, 각 리에는 리 당부(里黨部)를 두었다. 그리고 리 당부에는 9·6·3인조의 조반(組班)이 있었으며, 각 조장이 이들 조직을 이끌었다. 포천군당 초대 위원장은 윤주순(尹主淳), 2대 위원장은 윤성순이었다. 초대 부위원장은 이중락(李重樂)·김성묵(金聖默)·이기우(李起羽)였다.

1954년 실시된 3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윤성순이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리고 1956년 실시된 경기도 의회 의원 선거 포천군 2선거구에서는 이재긍이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선거구의 윤주순, 3선거구의 김영식은 낙선하였다. 1958년 실시된 4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윤성순이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따라서 제1공화국에서는 자유당이 우위를 차지하였다. 직선제로 치러진 2대, 3대, 4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가 우위를 보였다.

1955년 9월 18일 이승만 정권을 견제하기 위해 민주당이 창당되었다. 민주당의 창당은 1954년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사사오입 개헌안이 통과되어 이승만의 장기 집권 길이 열리자, 같은 해 11월 30일 민주 국민당과 무소속 의원 60명이 자유당의 전횡을 저지하고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호헌 동지회를 구성한 데서 비롯되었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이 몰락하자 민주당은 1960년 7월 선거에서 혁명의 완수를 내세워, 민의원 233석 가운데 75.1%인 175명을 당선시키고, 참의원도 31명을 당선시켜 제2공화국의 집권당이 되었다.

제1공화국 시기의 초대 위원장은 김인봉이었고 2대 위원장은 김영구(金永求), 부위원장은 장소성(張小成)이었다. 제2공화국 시기 위원장은 김영구, 부위원장은 김의봉(金義鳳)·이기우·조경환이었다. 1956년 실시된 경기도 의회 의원 선거에서는 포천군 3선거구에서 장소성이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4·19 혁명 후인 1960년 7월 29일 치러진 5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김영구가 당선되었다. 그리고 1960년 12월 12일 실시된 경기도 의회 의원 선거 포천군 1선거구에서는 민주당의 서장석이, 2선거구에서는 신민당의 김영준이 출마하여 모두 당선되었다.

2.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1963년 3월 8일 민주 공화당이 경기 제6지구당[포천군·가평군·연천군] 등록을 했으며, 창당 준비 위원장은 조종무(趙鍾武), 부위원장은 김도겸(金都謙)이었다. 사무소를 경기도 포천군 포천면 신읍리 43번지에 두었고, 등록 당시 당원 수는 51명이었다. 1대 지구당 위원장으로 김용채(金鎔采), 부위원장으로 정해선(丁海宣), 사무 국장으로 이규운(李奎運), 조직 부장으로 유봉렬(柳鳳烈)이 각각 선출되었다. 1963년 7월 구 민주당 신파 세력이 중심이 되어 창당한 민주당도 경기 제6지구당 등록을 했으며 위원장은 홍익표, 부위원장은 윤상혁·서항석·천진달, 총무부장은 이종윤, 조직부장은 이영재, 선전부장은 조병의였다. 민정당의 경기 제6지구당 위원장은 이기우였다.

5·16 군사 정변으로 등장한 박정희 정부의 제3공화국 초기 민주 공화당은 포천 지역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가 4만 9255표를 얻어 2만 8695표를 얻은 박정희 후보를 여유있게 앞섰고, 국회 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의 홍익표 후보가 민주 공화당의 김용채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이후 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4만 2168표를 얻어 3만 7459표를 얻은 윤보선 후보를 앞섰고, 국회 의원 선거에서도 오치성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민주 공화당의 독주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 자유가 상당 부분 위축된 제4공화국 시기 여당의 지위는 여전히 민주 공화당이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유신 헌법 규정에 따라서 통일 주체 국민 회의가 대통령과 국회 의원 1/3을 선출하는 등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포천 지역에는 민주 공화당 포천 지구당이 큰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다만 1972년 유신 체제의 성립으로 국회 의원 선거구가 중선거구로 변하게 됨으로써 경기도 포천, 연천, 가평, 양평 지역을 합하여 경기 제8지구당이 되었다.

1973년 2월 27일 실시된 9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민주 공화당은 김용채, 1967년에 통합 야당으로 새롭게 출범한 신민당은 천명기를 공천하여 당선시켰다. 공화당 포천 지구당 위원장은 같은 해 6월 9일 김용채로 변경되었다. 같은 해 5월 17일 민주당은 위원장을 천명기로 교체하고 부위원장은 이해송·김재갑이 맡았으며, 위원장 교체 당시 당원 수는 2,046명이었다.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10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천명기가, 공화당은 오치성이 각각 공천을 받고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3. 제5공화국

1980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등장한 전두환 정부 시기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인단의 간접 선거에 의해서 당선이 확정되었으며, 여당인 민주 정의당과 야당인 민주 한국당, 한국 국민당, 신한 민주당, 통일 민주당 등이 창당되었다. 여당인 민주 정의당이 1981년 2월 27일 포천 지역을 중심으로 지구당을 창당하였다. 민주 정의당 경기 12지구당[포천군·연천군·가평군]으로 창당되었고, 위원장은 이한동(李漢東)이 맡았으며, 등록 당시 당원 수는 9,206명이었다. 창당 이후 지구당 위원장은 이한동이 계속 맡았다. 지구당 초대 부위원장은 이협우, 박진규, 박치봉, 최흥식이 맡았다.

민주 한국당은 1981년 1월 13일 지구당을 창당했으며 위원장은 홍성표(洪晟杓), 부위원장은 이해송과 김태순, 총무부장은 최광균이었다. 한국 국민당은 1984년 7월 13일 창당하였다. 위원장은 김용채(金鎔采)였으며, 등록 당시 당원 수는 439명이었다. 신한 민주당은 1985년 1월 18일 지구당을 창당하였다. 위원장은 정재인(鄭在寅)이었으며, 등록 당시 당원 수는 230명이었다.

1981년 제11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민주 정의당의 이한동, 민주 한국당의 홍성표가 각각 당선되었고 소선구제로 바뀐 1985년 제1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이한동 후보가 제11대에 이어 연속 당선되었다.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통하여 노태우 정부가 등장하였다. 당시 여당은 여전히 민주 정의당이었다. 야당으로는 통일 민주당, 평화 민주당, 신민주 공화당이 있었지만 이중 통일 민주당과 신민주 공화당은 1990년에 민주 정의당과 합당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 자유당으로 변화하였다.

1988년 4월 11일 평화 민주당이 연천군·포천군 지구당을 창당하였다. 위원장은 김유근(金裕根)이었으며, 당시 당원 수는 150명이었다. 1991년 4월 13일에는 신민주 연합당 지구당으로 변경되었으나, 같은 해 9월 16일 신민주 연합당이 민주당과 합당되면서 당명이 민주당으로 변경되었다. 위원장은 윤성진(尹成鎭)이었다. 1995년 12월 21일에는 중앙당이 개혁 신당과 합당하여 통합 민주당이 됨에 따라, 민주당 포천 지구당도 통합 민주당 포천 지구당이 되었다.

1992년 3월 9일 통일 국민당 포천 지구당이 선거 관리 위원회에 등록되었으며 위원장은 이세환이었다. 1994년 7월 8일 통일 국민당이 신정치 개혁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이 되면서, 1994년 7월 14일 신민당 포천 지구당이 되었다. 위원장은 통일국민당 위원장이었던 이세환이 맡았다. 1995년 5월 31일에는 신민당과 자유 민주 연합이 합당되면서 자유 민주 연합 포천 지구당이 되었다.

민주 자유당의 김영삼 정부는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등장했는데 이후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었다. 신한국당은 다시 한나라당으로 당명이 바뀌었고, 2012년 2월에는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야당도 이합집산을 거치면서 자유 민주 연합, 통합 민주당, 새정치 국민 회의, 국민 신당 등이 나타나고 사라졌다.

헌정 사상 최초의 선거에 의한 여야 간 정권 교체로 1998년에 등장한 김대중 정부 시기의 여당은 새정치 국민 회의였다. 이후 새정치 국민 회의는 새천년 민주당, 열린 우리당, 통합 민주당, 대통합 민주 신당 등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0년에는 보다 진보적인 야당인 민주 노동당이 창당되었다.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15대 대통령 선거의 경우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 38.5%, 김대중 후보가 30.5%, 국민 신당의 이인제 후보가 29.24%를 각각 차지하였다. 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47.38%를, 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57.14%를 얻어 각각 1위를 차지하였다. 16대 대선에서는 경기도 전체에서 0.5%의 득표율을 보였던 이한동 후보가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는 10% 가까운 득표율을 올려 포천 출신의 후보다운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지방 자치]

근대적 의미에서 한국의 지방 자치 제도는 1949년 7월 4일 「지방 자치법」이 제정 공포됨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러나 법 제정 5개월만인 1949년 12월, 이승만 정부가 법을 개정하여 지방 의회 구성을 연기하였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1952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직선제 개헌안 통과를 위해 자신의지지 기반을 전국적으로 확충할 필요를 느끼고 그 방안으로 지방 의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 지리산 일부와 한강 이북 지역은 선거 실시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포천군에서는 1952년 지방 자치 선거가 실시되지 못하였다. 1952년 최초의 지방 의회 의원 선거 결과 자유당은 전국적으로 도 의회에서 48%, 시 의회에서 30%, 읍면 의회에서 25% 정도의 당선율을 보였다. 여기에 국민회, 대한 청년단, 대한 노동 총동맹 등의 기관 단체를 합하면 친여 세력은 무려 60%에 달하였다.

개헌안 통과를 위한지지 기반으로 지방 의회를 활용하고자 했던 이승만의 정치적 계산은 적중하였다. 이때 당선된 지방 의원들은 이승만의 기대에 부응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 개헌안의 통과 과정에 일어난 소위 부산 정치 파동에서 관제(官製) 데모의 주동이 되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1952년 7월 4일 국회는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한국 역사상 처음 선보인 지방 의회 의원들은 이같이 왜곡된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었다.

1956년 2월 정부가 2차 「지방 자치법」을 개정 공포함에 따라 1956년 8월 8일에는 시·읍·면장 선거와 시·읍·면 의회 의원 선거가, 이어 8월 13일에는 서울특별시 및 도 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1952년에 전쟁으로 인하여 선거가 연기되었던 포천군에서도 선거가 실시되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권이 11월에 들어 서울특별시장, 도지사, 읍·면장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지방 자치법」 5차 개정을 시도하여 성사시켰다. 읍·면장의 경우 이미 1956년부터 주민 직선으로 선출했으나, 자유당 정권이 1958년 4차 지방 자치법 개정 때,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여 여당 인물을 시·읍·면장으로 임명하기 위해 이를 임명제로 환원한 것이었다. 그래서 4·19 혁명 후 민주당이 읍면장 선거를 직선제로 환원시킨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60년 12월 12일에 서울특별시 및 각 도 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일어난 5·16군사 정변으로 지방 의회는 해산되고 이후 30년간 지방 자치가 단절되었다.

이후 지방 자치제의 실시는 제6공화국 정권이 수립된 직후인 1988년 3월 국회에서 「지방 자치법」 7차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다시 구체화되었다. 개정안의 핵심은 지방 자치 단체를 서울특별시·직할시·도의 광역 자치 단체와 시·군·구의 기초 자치 단체로 구분하고, 시·군·구 의회는 1989년 4월 30일 이내에 구성하며 그로부터 2년 이내에 시·도 의회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지켜지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1990년 12월 31일 개정 공포된 지방 자치법에 의해 30년 만인 1991년에 지방 자치제가 부활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1991년 3월 26일에는 시·군 자치구 기초 자치 단체 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여기서 선출된 14명의 의원을 구성원으로 포천군 의회가 개원하여 제4기 군 의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2003년 시 승격과 더불어 제1기 포천시 의회로 개원한 후 2012년 현재 8명의 의원이 제3기 포천시 의회를 이끌어가고 있다.

기초 단체장은 1995년 민선으로 당선된 1대, 2대 이진호(李進鎬)에 이어 박윤국(朴允國)이 3대, 4대에 당선되었으나 2007년 총선 출마를 위한 사퇴로 인해 서장원(徐壯源)이 4대, 5대 시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현황]

지방 권력을 견제하고 주민의 의사를 결집하기 위한 지방 의회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중앙 정치에 대한 지방 정치의 상대적인 자율성 확보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경기도 포천시의 지방 자치 흐름을 보면 중앙 정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포천 시민의 공적인 의사와 정책을 결정하는 활동으로서 포천의 지방 정치가 향후에 보다 민주화되고 다원화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N** 2020년에 맞게 수정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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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은 수정증보 사업을 통해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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