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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010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영조

[정의]

38선과 맞물려 있어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공격과 국군 및 유엔군의 반격의 경계선이 되었던 경기도 포천시의 영평천.

[개설]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에 있는 영평천은 38선과 맞물려 있어 6·25 전쟁 이전에 남북을 가르는 하천선이었을 뿐 아니라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에 영평천을 넘어 포천 북쪽 창수면 추동리·가양리, 영중면 양문리 일대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에 서울 북쪽인 동두천-포천 축선에서 국군 제7사단과 북한군 제3사단·제4사단 및 제105전차 여단과의 3일간에 걸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영평천을 넘어 포천-동두천 축선에서 벌인 3일간의 전투]

국군 제7사단은 서울의 관문인 동두천 축선과 포천 축선에서 북한군 주공 군단인 제1군단의 제3·제4보병 사단과 고속 기동 부대인 제105전차 여단과 1950년 6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전투를 벌였다. 이때 육군 본부에서는 서울 북쪽 의정부의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수도 경비 사령부, 제2사단, 기타 증원 부대[포병 학교 교도 대대 등] 등을 이 지역에 증원하였다. 그러나 역부족으로 개전 2일 만에 의정부가 함락되었고, 이후 전투는 서울 최후 저항선인 창동과 미아리 일대에서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지역은 서울-원산을 연결하는 국도 3호선, 포천-의정부를 연결하는 국도 43호선, 그리고 일동-서파-퇴계원-서울을 연결하는 국도 47호선[전쟁 당시 391번 도로]이 서울을 향해 남북으로 잘 발달되어 있었다. 특히 이들 도로 사이에는 종적으로 발달된 천보산맥광주산맥이 형성되어 있어 방어 입장에 있는 국군 제7사단에게는 인접 부대와의 횡적인 연계와 종심 배치가 불리한 반면, 공격하는 북한군 제1군단 입장에서는 기계화 부대의 운영과 국군의 종심 지역 공격에 매우 유리한 지리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전쟁 당시 이 일대를 담당하였던 국군은 유재흥 준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7사단이었다. 사단은 제1연대를 동두천 방향에, 제9연대를 포천 방향에 배치하였다.

사단 예비 연대인 제3연대는 6월 15일에 육군 본부 명령에 의해 수도 경비 사령부로 전환되었고, 대신 충청남도 온양에 위치한 제2사단 소속의 제25연대가 사단으로 배속되었다. 그러나 주둔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전쟁 당일 제25연대가 충청남도 온양에 있었기 때문에 사단 예비 연대로서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로 서울의 관문을 방어하고 있던 제7사단은 개전 초기 2개 보병 연대로 북한군의 2개 정규 보병 사단 및 1개 전차 여단과 처음부터 전투력이 열세한 상태에서 불리한 전투를 하게 되었다.

반면 북한군은 총참모부의 남침 계획 제1단계 작전 목표인 2일차에 서울 점령, 국군 주력의 격멸, 그리고 한강교를 조기 점령하고자 최정예 부대인 제1군단의 주력을 이 지역에 집중 투입하였다. 최초 서부 전선을 책임지고 있던 북한군 제1군단은 동두천 축선에 제4사단과 1개 전차 대대, 포천 축선에 제3사단과 제105전차 여단을 투입하고, 제2제대로 제13사단·제15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최초부터 국군보다 병력 면에서는 7배, 화력 면에서는 18배나 우세한 상황에서 공격을 전개하였다.

중서부 지역에서의 작전은 작전 경과 측면에서 크게 3단계로 전개되었다. 제1단계는 최초 38도선 경계 진지 전초전으로부터 주저항선 전투가 전개되는 개전 당일 상황으로 국도 3호선 도로상의 동두천과 국도 43호선 도로상의 포천이 적의 수중에 함락된 시기이다. 제2단계는 북한군의 제3사단과 제4사단이 동두천과 포천을 점령한 후에 의정부 북쪽 3㎞~4㎞에 설정된 1일차 진출 목표에 도달하였을 때, 수도 서울 방어에 위협을 느낀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이 수도 경비 사령부 제18연대와 제2사단을 의정부 축선과 포천 축선에 투입하여 동두천과 포천 탈환을 목적으로 역습을 시도한 시기이다.

그 결과로 제7사단은 동두천을 일시적으로 탈환하였으나, 포천 축선의 제2사단이 역습에 실패한 데 이어 의정부가 적에게 점령당한 26일까지의 상황이다. 또한 국도 47호선[전쟁 당시 391번 도로]상의 내리[퇴계원 북쪽 16㎞]에 긴급 배치된 육군 사관 학교 생도 대대와 서울시 전투 경찰 대대가 적의 공격을 받고 태릉 방향으로 후퇴한 상황을 포함하고 있다. 제3단계는 26일에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적에게 피탈되면서 이 지역에 투입된 국군 제2사단·제7사단과 수도 경비 사령부 예하 부대 및 지원 부대[포병 학교 제2교도 대대, 기갑 연대 장갑 소대]들이 수도 서울의 최후 방어선인 미아리-태릉 지역에 급편 방어 진지를 형성하는 단계까지이다.

이와 같이 국군 제7사단과 북한군 제2군단의 주력이 맞붙은 동두천-포천 일대를 연하는 중서부 지역 작전은 북한군 제1군단의 막강한 화력과 전차 부대의 공격을 받고 개전 2일째인 6월 26일에 서울 북쪽 18㎞에 위치한 의정부가 함락됨에 따라 국군의 전 전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먼저 이 지역에 배치되었던 국군 부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창동 일대에 급파되어 방어 진지를 편성하게 되었다. 또한 작전 지역 내에 있던 육군 사관 학교 생도 대대도 적의 진출선 후방에 놓이게 됨으로써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국군 제7사단의 좌측에서 북한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봉일천 전투를 수행하고 있다가 의정부의 함락으로 동측방이 위협을 받게 되자 화포 및 중화기를 유기한 채 한강 이남으로 분산하여 철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7사단의 동측인 중동부 지역에서 적과 교전을 벌이고 있던 춘천-인제 축선의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과 동해안 축선의 제8사단[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육군 본부의 사전 조치로 인해 무기 및 장비를 그대로 보유한 채 전술적 후퇴를 하게 됨으로써 지연 작전 시 서부 전선의 미군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중동부 전선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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