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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 학파 김평묵과 독립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009
한자 華西學派金平默-獨立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포천시
집필자 이계형

[개설]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서양 세력이 차차 동쪽으로 옮김]의 위기가 닥치자 정통 주자학(朱子學)을 공부한 지식인들은 위정척사 운동으로 이에 맞섰다. 위정척사 운동은 반침략·반외세의 정치사상으로서, 성리학적 세계관과 지배 체제를 강화하여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당시 이를 주도하였던 대표적인 조직이 화서 학파였다.

[화서 학파의 뿌리]

화서 학파는 경기도 양근에서 이항로(李恒老)의 강학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학파이다. 이항로는 지방 수령 등에 제수되었지만 이를 고사하고 향리에서 강학을 위해 여숙강규(閭塾講規)[수업을 받을 때 지켜야 할 8가지 규칙]를 수정, 실시하였는데, 이 중 특히 심전 주리론에 바탕을 둔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荻)’을 강조하였다. 이항로는 공리공론(空理空論)이나 탁상이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이(理)와 기(氣), 주리적 이기 이원론(理氣二元論)을 펴며 이는 조선을, 기는 서양으로 해석하였다. 이의 조선이 주체가 되지 않고 기인 서양이 주체가 되면 천하가 위태로워지며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심전 주리론(心傳主理論)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라는 윤리와 아울러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처럼 하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처럼 한다는 애국 사상과 자주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조선 말기의 민족 사상인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가 되고, 나아가 민족 운동의 실천적 지도 이념으로 승화하였다.

이항로의 수제자였던 김평묵(金平默)은 심전 주리론을 강화하며 위정척사 운동을 이어 나갔다. 그는 유교적 가치 질서와 소중화인 조선을 지키기 위해 척사론을 주장하였다. 이후 화서 학파는 경기 지역을 비롯하여 강원, 충청, 호남 지역과 관서 지역 등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김평묵은 1855년(철종 6) 춘천의 삼천강(三川江) 가로 이사하여 홍재구(洪在龜)·홍재학(洪在鶴)·김난근·최운경·민창호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는 1876년(고종 13) 이항로의 제자였던 유중교(柳重敎)가 경기도 가평으로 이주하자 그곳에서 함께 열흘마다 강학하였다. 당시 김평묵은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의 시각에서 홍재구·유인석(柳麟錫) 등 46명의 유생을 규합해 ‘병자 수호 조약 반대 상소’를 시작으로 구국 활동에 뛰어들었다. 서양과 일본이 물질적 이를 추구해 도래하고, 그들과의 강화가 조선에 도덕적·경제적 피해를 입힐 것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김평묵은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개화 움직임에 대해서도 화이 의식적(華夷意識的)인 위정척사의 입장에서 이를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조선은 일본과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인 접촉이 잦아졌다. 1876년 일본 대리 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조선에 건너오는가 하면 수신사 김기수(金綺秀)에 이어 1880년(고종 17) 김홍집(金弘集) 일행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를 계기로 개화사상이 침투하였고 위정척사 운동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특히 김홍집이 일본에서 들여온 황준헌(黃遵憲)의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 뇌관으로 작용하였다.

『사의조선책략』에는 러시아의 조선 침략 가능성에 친중국(親中國)·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하는 ‘균세’의 방법으로 방지할 것, 천주교는 주자학이나 양명학(陽明學)과 같은 것이므로 배척해야 한다는 것 등이 강조되어 있었다. 더욱이 정부에서 『사의조선책략』을 복사해 전국 유생에게 배포하자 김평묵 등은 이를 위기로 받아들였다. 개화사상은 오랑캐인 구미 열강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종용하고, 천주교·서양학 등 사학(邪學)을 주자(朱子)나 왕양명(王陽明)과 같은 성현의 학과 동일시하는 매우 위험한 사상이므로 마땅히 배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881년(고종 18) 김평묵의 문인들은 신사 척사 상소(辛巳斥邪上訴)를 올렸다. 상소는 김홍집·이유원(李裕元)의 규탄에 그치지 않고 국왕이 친정 이래 위정척사의 태도가 석연치 않았다는 것, 사학의 무리를 방치한 실정이 있었다는 것, 나아가 국왕의 척사윤음(斥邪綸音)[서교(西敎)를 배척하기 위하여 전국의 백성에게 내린 윤음]이 기만적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여느 상소와 달리 과격하여 소수(疏首)였던 홍재학이 사형을 당하고, 김평묵은 전라도 지도로 유배되어 해배되는 1884년(고종 21)까지 3여 년 동안 호남의 문인들을 길러 냈다.

김평묵의 척사론은 다른 유림들로부터 지지만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척사 운동은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 세력을 격퇴해야 한다는 의식과 더불어 실세한 남인, 소론 세력 및 개항을 주도한 당로자(當路者)를 비판하였다. 특히 신사 척사 상소는 영남·관동·경기·충청·전라 등지의 척사론을 수용하여 재야 유림 세력과 연합하였고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 세력을 격퇴시키고자 하였다. 근대 민족운동의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는 “나라 전체의 여론이 서양과 싸우면 상대할 수가 없어 반드시 망하며, 강화를 하면 싸우지 않고도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 정신은 위정척사의 유림들에게 확산되어 갔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인 뜻을 현실에서 이룩하지 못하자, 그는 68세 때 포천 영평(永平)에 운담 정사(雲潭精舍)를 짓고 강학에 전념하였다. 김평묵이 1891년(고종 28) 생을 마치자 제자들이 그곳에 주자와 송시열(宋時烈), 이항로, 김평묵의 영정을 모셔 놓고 영당으로 만들고 ‘운담 영당’이라 불렀으나 1950년 6·25 전쟁 당시 소실되어 현재는 무심한 터만 남아 있다.

김평묵은 1900년(고종 37) 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미원 서원(迷原書院) 및 보산 서원(寶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중암집(重庵集)』·『학통고(學統考)』·『해상필어(海上筆語)』·『경장문답(更張問答)』·『척양대의(斥洋大義)』·『대곡문답(大谷問答)』 등이 있다.

[구한말 의병 운동의 밑바탕으로 자리 잡은 의리론]

구한말 김평묵의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제자가 의리론의 입장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에는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 가장 대표적인 문인이 유인석이다. 유인석은 1895년(고종 32) 10월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이필희(李弼熙)·서상렬(徐相烈)·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등 문인 사우들과 함께 ‘복수 보형(復讐保形)[시해당한 왕후의 복수를 하고 단발하지 않은 채 신체를 보존한다]’의 기치를 내걸고 1896년 2월 7일 의병을 일으켰다. 유인석 의병진은 한때 3,000명을 넘었으며, 제천·충주·단양·원주 등지를 중심으로 한 중부 지역 일대를 석권하면서 친일적인 관찰사나 군수 등 ‘토왜(土倭)’들을 처단하여 기세를 크게 떨쳤다.

1908년(순종 2) 7월, 유인석은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고, 이후 이상설(李相卨)·이범윤(李範允) 등과 함께 항일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10년 6월 연해주 의병 세력의 통합체인 13도 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하여 도총재(都總裁)로 추대되었다.

충청북도 단양 출신의 서상렬(徐相烈)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의병을 일으켜 풍기·제천·상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896년(고종 33) 강원도 낭천에서 순국하였다. 주용규(朱庸奎)는 유인석의 휘하에서 참모로 활약하면서 팔도(八道)와 백관(百官),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을 짓기도 하였으나 1896년 충주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의병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윤석봉(尹錫鳳)은 유인석에게 격려문을 보내어 의병을 지원하였고, 유중악(柳重岳)은 을미사변 이후 의거를 주창하며 의병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집안 조카인 유인석의 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 이근원(李根元)은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용문산에 들어가 유중악·유홍석·유봉석·이소응 등과 거의를 모의하였지만, 의리론(義理論)의 입장에서 의병 운동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1896년과 1902년(고종 39)에 군자금을 내놓기도 하였고, 1896년에는 춘천 의병장 습재(習齋) 이소응(李昭應)이 지평현의 감역 맹영재(孟英在)에게 구원병을 청하러 갔다가 구금되자, 유중용·이장우 등 동문 유생들과 함께 찾아가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는 1906년(고종 43) “의병을 일으켜 일진회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모함을 받아 여주 헌병대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당시 일제가 주는 은사금(恩賜金)을 거부하다 헌병 분견소에서 일주일간 고초를 겪었다.

경현수(慶賢秀)는 1905년(고종 42)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강원형(姜遠馨)·김동필(金東弼) 등이 그 해 1월에 설치한 대한 십삼도 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에 가담하여 전국의 유생들과 함께 궁궐 앞에서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십삼도 유생 연명소(十三道儒生聯名疏)」를 올렸다.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순종에게 양위를 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의 지사들이 의병을 일으켜 마침내 1908년 양주에서 13도 의병 연합 부대를 편성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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