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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군 포천 전투지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882
한자 泰國軍抱川戰鬪址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야미리 산6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재지 태국군 포천 전투지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야미리 산6지도보기
성격 전투지

[정의]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야미리에 있는 1951년 태국군이 포천 일대에 배치되어 전투를 수행한 곳.

[개설]

태국군의 참전 경위는 유엔이 한국 군사 원조를 결의하자 6월 30일 미곡 지원을 유엔에 통보하였고, 유엔 사무총장이 7월 14일 지상군의 파견을 요청하자 7월 20일 1개 여단 규모인 지상군 4,000명의 파견을 유엔에 통보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유엔군의 북진으로 전황이 호전되자 지상군은 1개 대대 규모로 축소되었다.

태국 해군은 1950년 10월 22일 1개 대대 규모의 지상군과 추가로 파견될 적십자 의무대를 싣고 16일간의 항해 끝에 11월 7일 부산에 입항하였다. 지상군을 수송한 해군도 사세보로 이동하여 극동 해군의 제95기동부대에 배속되었다. 태국은 지상군과 해군을 파견한 데 이어, 1951년 6월 18일 1개 수송기 편대와 항공 의무대를 일본 다치카와[立川]에 있는 미 공군 제374비행단에 배속시킴으로써 명실공히 6·25 전쟁에 육·해·공군을 파견한 다섯 번째 국가가 되었다.

지상군 대대는 1950년 12월 5일 평양으로 이동하여 개성 일대에서 유엔군의 철수를 엄호한 후 12월 13일 제8군 예비대가 되어 수원으로 이동하였다. 중공군이 신정 공세를 개시하자 대대는 1월 2일 서울 북쪽 신둔리로 진출하여 영 제29여단에 배속되었다. 1월 3일 1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이 제29여단 지휘소로 침투하자, 참전 이후 처음으로 중공군과 격전을 벌여 격퇴한 후 여단 주력과 함께 한강을 건너 수원으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되어 3월 7일 재반격 작전을 실시하고, 4월 3일 화천 저수지로 진출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22명을 생포하고 포로로 잡혀 있던 미군 4명을 구출하였으나, 전사 1명과 부상 11명의 손실을 입었다. 춘계 공세를 개시한 중공군이 4월 28일 서울 진출을 기도하자 창동 일대에서 밤새도록 격전을 벌여 중공군 32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중공군을 추격하여 7월 31일 율동리 부근으로 진출하였다. 이때 제2중대는 8월 18일 역곡천 남쪽의 346고지 부근에서 적의 집결지를 기습하여 70여 명을 사살하고 다량의 보급품을 파괴하였다.

이후 철원 서쪽의 티본(T-bone) 고지 남쪽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다. 11월 13일 자정 무렵 2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이 전차로 전초 소대를 기습 공격하였으나, 백병전을 벌여 중공군 30여 명을 사살하여 격퇴하였다. 이때 미 제1기병이 일본으로 복귀함에 따라 12월 15일 미 제2사단 제9연대로 배속이 변경되었다. 1952년 전반기 동안 김화 서쪽 탑골 부근과 갈화동에서 정찰과 매복 활동을 벌였으나 특별한 접전은 없었다. 부대를 정비한 대대는 10월 22일 호막리로 이동하여 주저항선에 배치되었다.

10월 27일 자정 무렵 1개 소대로 주저항선 전방 복개 고지를 기습하여 중공군 20여 명을 사살하고 3명을 포로로 잡았다. 중공군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11월 1일 어둠이 깔리자 포크찹(Porkchop) 고지를 집중 포격한 후 저녁 9시경 2개 중대 규모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전투는 대대가 참전한 이후 치른 가장 치열한 전투로 확인된 적 시신만 50여 구나 되었고, 대대도 8명이 전사하고 14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제8군은 태국 장병들의 용맹성을 인정하고 ‘작은 호랑이[The Little Tigers]’라는 애칭까지 지어 주었다.

중공군은 휴전 회담 이전에 김화 북쪽의 사동 지역을 수중에 넣기 위하여 1953년 7월 17일 해가 지자 대대 지역을 집중 포격한 후 저녁 10시경 2개 중대 규모로 한탄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대대가 이를 격퇴하였다.

해군의 활동은 극동 해군에 배속된 태국의 프리깃함 파라새(Prasae)호와 방파공(Bangpakong)호, 그리고 수송선 시창(Sichang)호는 1950년 12월 말까지 사세보 미 해군 기지의 수로 엄호 작전에 투입되었다. 파라새호와 방파공호는 1951년 1월 3일 동해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1월 7일 아침 거친 파도가 엄습하여 파라새호는 38도선 16㎞ 북쪽 속초 부근 해안에서 좌초되었다. 좌초된 함정을 구조하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다가 2명이 전사하고 23명이 부상을 입었다. 제95기동함대 사령관은 파라새호를 보수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오후 6시에 함포 사격으로 파라새호를 격침시켰다.

7월 15일 수송선인 시창호가 태국 정부의 요청으로 귀국함에 따라 태국 함정은 방파공호만 남게 되었다. 이때 태국은 미국으로부터 프리깃함 2척을 지원받아 10월 29일 파라새[HMTS Prasae Ⅱ]호와 타친[HMTS Tachin]호로 명명하고 12월 20일까지 해상 훈련에 주력하였다. 이후 태국 함정들은 특별한 상황 없이 휴전 협상이 조인된 1953년 7월 27일까지 주로 수송선단 엄호 작전과 함정 정비 및 보급을 반복하면서 헌신적으로 유엔 해군의 작전을 지원하였다.

공군의 활동으로는 1951년 6월 13일 태국 C-47 수송기 3대가 미 제135비행사단 제374병력 수송비행단 제21비행대대에 배속되어 6·25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당시 미 공군이 보유한 C-47 수송기에는 병상 또는 의료 설비가 없었으며, C-54 수송기는 활주로가 짧은 한국 비행장에서는 운용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로 인해 소형이면서 의료 설비를 갖춘 태국 수송기들이 긴급 후송 임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이때 수송기 대대는 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중환자들을 후송하였다.

1952년에 접어들면서 미 극동 공군은 수송 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C-54 수송기를 C-124 수송기로 교체하였다. 그러나 한국에는 C-124 수송기의 이착륙이 가능한 활주로가 네 곳밖에 없어 태국 수송기의 활동은 오히려 증가되었다. 1953년 2월부터 김포 비행장에 주둔 중인 그리스 수송 대대가 한국 내 수송 임무를 전담함에 따라 태국 공군은 휴전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주로 일본 내 공군 기지 간 병력 및 보급품 수송 임무를 수행하였다.

태국은 6·25 전쟁에 3,650명이 참전하여 전사 129명, 부상 1,139명의 손실을 입었다. 휴전 후 지상군은 1개 중대만 잔류시키고 주력 부대는 1954년에 철수하였다. 해군은 1955년 1월, 공군은 1964년 11월에 철수하였으며, 최종 잔류 부대도 1972년 6월에 철수하였다.

[위치]

태국군 포천 전투지포천시 영북면 야미리 산6번지에 있다.

[현황]

지형은 당시 그대로이며, 1974년 10월 1일 건립된 태국군 참전비가 있다.

[의의와 평가]

태국군 지상군 대대는 1950년 11월 7일 부산에 도착하여 미 제8군의 작전 통제 하에 작전을 실시하였다. 최초 태국군 대대는 유엔군 전선 후방에서 4개월간 부대 정비와 훈련 및 후방 작전을 전개한 후 1951년 3월 초 처음으로 전방 지역인 포천 야미리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태국 군 대대는 유엔군의 반격 작전 계획에 따라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되어 포천 지역 일대에서 공격 작전에 참가하였다.

태국군 대대는 미 제1기병사단과 함께 공격 작전을 개시하여 인해 전술로 밀고 내려온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포천 지역에서 38선 일대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대대는 포천 일대에서 최초로 전방 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희생을 치렀으며, 포천 일대의 중공군을 38선 이북으로 퇴각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 전쟁사』 10(국방부 전사 편찬 위원회, 1978)
  • 국가 보훈처 국가 수호 사적지 조사 보고서(http://815book.co.kr/sajuk)
  • 전쟁 기념관(http://www.warmem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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