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30
한자 李德馨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자작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진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1년연표보기 - 이덕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0년 - 이덕형 별시 문과에 을과 급제
몰년 시기/일시 1613년연표보기 - 이덕형 사망
출생지 이덕형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자작동
묘소|단소 이덕형 묘소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신도비 이덕형 신도비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사당|배향지 용연 서원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사당|배향지 도남 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도남동
사당|배향지 근암 서원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광주廣州)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증조할아버지는 부사과 이수충(李守忠)이며, 할아버지는 증 좌찬성 이진경(李振慶)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이민성(李民聖)이다. 어머니는 현량 유예선(柳禮善)의 딸이고, 부인은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덕형(李德馨)[1561~1613]은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자작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하였으며, 문학에 통달해 어린 나이로 양사언(楊士彦)과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글씨에 뛰어났다, 1574년(선조 7) 영평(永平) 우두연(牛頭淵)에서 양사언 형제와 유람하고 이귀(李貴), 박경신(朴慶新) 형제와 지사(知事) 윤우신(尹又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교유하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1580년(선조 13)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정립(李廷立)·이항복과 함께 ‘경진 삼이(庚辰三李)’로 불렸다. 승문원 정자를 거쳐 재주 있는 신하로 선발되어 선조로부터 서적을 받았다.

1582년(선조 15) 6월, 이이(李珥)의 추천으로 이항복, 오억령(吳億齡) 등과 함께 『통감강목(通鑑綱目)』 강독을 맡았다. 그해 명나라에서 온 조사(詔使) 왕경민(王敬民)이 이덕형을 만나보고 싶어 하였으나 사적인 면대는 도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서 사양하였다. 이에 왕경민이 아쉬워하며 그의 인격을 칭찬하는 글을 보내 왔다고 한다. 1583년(선조 16)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이듬해 서총대(瑞葱臺)의 응제(應製)에서 장원하였다. 1585년(선조 18) 평안도 어사로 나아갔다가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 좌랑이 되고, 1588년(선조 21) 이조 정랑이 되어 선위사(宣慰使)에 차임되어 동래에 내려가 일본 사신 겐소[玄蘇] 등을 접대하였다.

1590년(선조 23) 이덕형은 왜의 사신을 반송(伴送)하여 동래까지 내려갔으며, 이어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 등을 부산포에서 전송하였다. 그 후 직제학에 임명되었고, 동부승지와 이조참의,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세우는 논의에 앞장서서 주장하여 광해군(光海君)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해 5월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도록 계청하였고, 6월에는 대사헌이 되고 왜적이 대동강에 이르러 화의를 요청하자 단기(單騎)로 대동강에서 겐소, 평조신(平調信)과 만나 이를 논의하였다.

어가를 호종하여 숙천(肅川), 영변을 거쳐 정주에 이르러 청원사(請援使)를 자청, 명나라로 가서 파병을 성사시켰다. 돌아와 대사헌이 되어 명군을 맞이하였으며, 12월 한성 판윤이 되었다가 접반사에 차임되어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만나 전란 중 줄곧 같이 행동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4월 입경하였다가 곧 남하하고, 형조 판서와 훈련도감 부제조, 병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이조판서로 훈련도감 당상을 겸하였다. 이어 시무 8조를 올리고, 1595년(선조 28) 경기·황해·평안·함경 4도 체찰 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선조 30) 왕명으로 복수군(復讐軍)을 모집하였다.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하옥되자 죄가 없음을 밝혀 구원하려 노력하였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서 접반사가 되어 의주로 가서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해 한양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직산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양호와 함께 명군과 울산까지 동행, 그들을 위무하였다. 도중에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우의정으로 승진하고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 도제조를 겸하였다. 1599년(선조 32) 붕당의 조제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어 명을 받고 전라도 나주와 남원 등지를 순행하고 돌아와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601년(선조 34) 행판중추부사로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 체찰사를 겸해 전란 뒤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였다. 대마도 정벌을 건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 해 영의정에 올랐다. 1606년(선조 39)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창 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이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하다가 삭탈관직 당하였다. 그 뒤 용진으로 물러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남인 출신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된 후 남인과 북인의 중간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해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1634년(인조 12) 장자 이여규(李如圭)가 문집을 간행하였고, 1668년(현종 9) 손자 이상정(李象鼎)이 문집을 중간하였다. 고종 때 이르러 부록 4권이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문고의 내용 중 대부분이 임진왜란과 관련한 것으로, 특히 소차(疏箚)[상소(上疏)와 차자(箚子)를 아울러 이르는 말]나 계사(啓事)[임금에게 일을 아뢰던 일. 또는 그런 글], 간독(簡牘)[편지] 등은 왜란 때의 국내 실정이나 전황, 그리고 대명(對明)·대왜(對倭)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특히 승려(僧侶)를 대상으로 읊은 40여 수의 시(詩가) 있는데, 이는 작자가 불교에 친밀감을 가졌다기보다 임진왜란 중 의승군(義僧軍)이 봉기해 적과 맞아 싸웠거나 또는 축성(築城)에 크게 기여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진시무팔조계(陳時務八條啓)」에서는 활민책(活民策), 둔전책(屯田策), 어염 판매책, 방수책(防守策), 군병 훈련책, 병황(兵荒) 후의 내치책(內治策), 관리 삭역지폐(官吏數易之弊), 민심 수습 등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보였음을 나타낸다. 간독은 90편 가운데 76편이 이항복에게 보낸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의 친분 관계가 돈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종계서(宗稧序)」와 「족보서(族譜序)」에서는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돈목(敦睦)을 위해 종계와 족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회재 선생 논 태극 서발(晦齋先生論太極書跋)」에서는 이언적(李彦迪)이 논한 태극서 4편을 높이 평가하였다. 「정기록발(正氣錄跋)」에서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고경명(高敬命) 삼부자의 충의를 찬양하였다.

「훈제자첩(訓諸子帖)」에서는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소옹(邵雍)·주희(朱熹) 등 중국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말을 인용, 자손을 훈계하였다. 「계자문(戒子文)」은 아들 이여벽(李如璧)이 관서 지방에 수령으로 나갈 때 중국 고사를 들어 수령직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처신에 늘 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임진왜란 때 의승대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난이 끝난 뒤 일본에 건너가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하였던 송운 대사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공적을 기린 「제송운문(祭松雲文)」이 남아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12년(광해군 4) 익사형난공신(翼社亨難功臣)에 책훈되고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691년(숙종 7) 포천 서원에 향사되었는데, 포천 서원은 이듬해 ‘용연 서원’으로 사액되었다. 1869년(고종 6) 영정을 상주 도남 서원(道南書院)으로 옮겼다. 문경의 근암 서원(近巖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신도비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는데, 묘와 함께 경기도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 신도비문은 조경(趙絅)이 짓고, 묘지명은 이항복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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