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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왕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2052
한자 弓裔王-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포천시
집필자 이병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0년 - 「궁예왕 이야기」『포천의 설화』 수록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2000년 09월 22일 - 「궁예왕 이야기」 이병찬이 이현문에게 채록
관련 지명 명성산 -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채록지 「궁예왕 이야기」 -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성격 지명 유래담|패망담
주요 등장 인물 궁예|간신
모티프 유형 지명의 유래|포악한 왕의 패망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서 궁예(弓裔)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궁예왕 이야기」궁예[?~918]의 죽음과 관련된 지명을 설명하는 지명 유래담이자, 궁예의 호색함에 나라가 망하였다는 포학한 왕의 패망담이다. 궁예는 후고구려[태봉]를 건국한 인물로, 아버지는 신라 47대 헌강왕(憲康王)이고,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궁녀라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실려 있는 「궁예 탄생 설화」에 의하면 어려서 한쪽 눈을 잃었고, 승려가 되었다가 양길(梁吉)의 부하로 901년 후고구려를 세워 왕이 되었다. 905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겼고, 911년 국호를 태봉이라 하였다. 918년 왕건(王建)[877~943] 등에 의해 폐위되어 쫓기다가 지금의 평강에서 백성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포천은 철원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 때문에 궁예와 관련된 지명 전설이 많이 전하고, 특히 산정 호수가 있는 명성산[일명 울음산] 일대가 그러하다.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에는 궁예산성이 전하고, 그의 패주와 죽음에 대한 설화가 서너 편이 채록되어 있다. 「궁예왕」, 「궁예와 명성산」 등도 궁예와 관련된 유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000년 이근영·이병찬 등이 엮고 포천 문화원에서 간행한 『포천의 설화』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2000년 9월 22일 이병찬이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이현문[남, 70]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내용]

궁예가 가평 현등산에 천연의 요새를 친 뒤 왕건의 공격을 막아 내다, 이 산에서 죽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 궁예의 무덤은 철원에서 금강산 들어가는 곳에 있다고 한다. 삼방역이라는 곳인데, 궁예가 나무에 기댄 채 미동도 않자 왕건의 수하들이 확인한 결과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고 한다. 죽음조차 서서 맞이한 그의 주검 위에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궁예와 관련이 있는 이곳의 이름은 여러 개가 전해진다. 강사골, 티나무골, 보라골, 서렁골 등이 그것이다.

강사골은 강한 군사를 배치한 데서 유래하고, 티나무골은 대전투의 치열함에서, 또 보라골은 왕건의 군사를 견제하려 했음에서 유래된 이름들이다. 마지막으로 서렁골은 나라가 말했음을 궁예의 군사들이 한탄한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궁예가 해동궁을 세운 후 어렵게 쇠기둥을 세웠는데 드나들 때마다 만지면서, “야! 이 기둥은 천 년 만 년 썩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궁예가 신하들에게 무슨 이유로 이 쇠기둥을 세웠느냐고 물으니 간신이, “왕께서 이 쇠기둥처럼 썩지 않고 천 년 만 년 군림하시라고 지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궁예가 그 간신을 둘도 없는 부하라고 여기면서, 그 사람 말을 신임을 했다. 하루는 궁예가 그 간신에게, “그럼 내가 천 년 만 년 왕 노릇을 하려면 천 년 만 년을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천 년 만 년 살 수 있느냐?”라고 물으니, 간신이 말하길

“왕께서 새로운 처녀장가를 자꾸 드시면 그 젊은 사람의 기를 타서 천 년 만 년 살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궁예는 포천, 철원 일대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다 끌어다가 궁녀로 삼았다. 결국은 간신의 말만 믿고 포악한 정사를 하던 궁예는 패망할 수밖에 없었다.

궁예가 쇠가 아닌 이상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인데, 왕건에게 크게 지고 나서 도망을 가다가 하연리, 지연리라는 데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농부들이 가래질을 하다 말고 가래로 도망가는 궁예를 찔러서 죽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근처의 난전 터 역시 궁예가 나라의 망함을 한탄하면서 정성스레 지은 것이라 전해진다.

[모티프 분석]

「궁예왕 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지명의 유래’, ‘포악한 왕의 패망’ 등이다. 「궁예왕 이야기」궁예라는 인물담과 ‘강사골’, ‘티나무골’, ‘보라골’, ‘서렁골’, ‘난전 터’ 등 패주와 죽음에 연관된 지명 유래담이다. 특히 포천, 철원 일대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다 끌어다가 궁녀로 삼아 천 년 만 년 왕으로 군림하려고 해동궁을 쇠기둥으로 세웠다는 궁예의 호색함을 문제 삼아서 패망 원인을 설명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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