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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일재포천묘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974
한자 寒食日在抱川墓舍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흥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675년 - 「한식일재포천묘사」 저자 조태억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728년 - 「한식일재포천묘사」 저자 조태억 사망
성격 한시
작가 조태억

[정의]

조선 후기 조태억이 한식날에 선영이 있는 포천의 묘사에서 지은 칠언 율시의 한시.

[개설]

「한식일재포천묘사(寒食日在抱川墓舍)」는 조선 후기 문신 겸재(兼齋) 조태억(趙泰億)[1675~1728]이 한식날에 선영(先塋)이 있는 포천의 묘사(墓舍)에서 정희교(鄭希僑)와 더불어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고 금수정(金水亭)을 방문하면서 지은 한시이다. 조태억은 1698년(숙종 24) 4월에 모친상을 당해서, 포천의 독곡(獨谷)에 장사를 지냈다. 조태억과 포천과의 관계는 이로부터 비롯된 듯하다. 「한식일재포천묘사」조태억의 문집 『겸재집(兼齋集)』 권(卷) 17에 수록되어 있다.

「한식일재포천묘사」에서 조태억과 함께 하고 있는 정희교는 속리산에 은거해 죽을 때까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동리 선생’이라고 부른 인물이다.

정희교는 마을의 자제 중에서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이 있으면 밭두둑에 앉히고 붓과 벼루를 밭고랑 사이에 두고 가르쳤는데, 부자가 짝을 지어 밭을 갈고 나면 어느새 글 한 편을 지었다고 한다. 왜 과거를 보지 않고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묻자, 정희교는 태연하게 “벼슬이 어찌 농사를 지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라고 대답했다.

정희교는 열일곱에 아들 정윤을 낳고 아내가 일찍 죽었으나, 재취를 얻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러나 책이 차지하는 공간이 사람보다 많아서 약 1천여 권의 책을 쌓아 두었다. 정윤이 어릴 때 “책을 팔아 새어머니를 모셔 집안을 돌보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권하면, 그는 “그런 말 하지 마라. 나는 자식 없이는 살아도 책 없이는 못 산다.”라며 거절할 정도로 책을 소중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17세기에는 정희교를 비롯하여 여항 시인인 홍세태(洪世泰), 석희박(石希璞), 유찬홍(庾纘洪)[1629~1697], 조수삼(趙秀三)[1762~1849] 등이 ‘낙사(洛社)’를 결성하여 작품 활동을 했다. 정희교는 영사시(詠史詩)에 뛰어났으며, 작품 가운데 「들에서 자다[野宿]」라는 시(詩)가 대표적이다.

[내용]

「한식일재포천묘사」[한식날 포천의 묘사에서]의 제목에는 “여정희교찰상인 방금수정(與鄭希僑察上人 訪金水亭)[정희교와 더불어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고 금수정을 방문했다]”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문일출원홍진(靑門一出遠紅塵)[도성 문을 나서니 속세에서 멀어지는데]

헌면하능반아신(軒冕何能絆我身)[높은 관직이라도 어찌 이 몸 얽어맬 수 있겠는가]

불우불풍한식절(不雨不風寒食節)[비바람 없는 한식날에]

차안차마한유인(借鞍借馬閑遊人)[말안장에 의지해 한가히 노니는 사람아]

진포부세난평사(盡抛浮世難平事)[뜬구름 같은 세상에 모든 욕심 다 내던져 버렸건만 평소 일들은 힘겹기만 하네]

중속선구미료인(重續仙區未了因)[신선의 고장 끊임없이 다녔건만 아직도 인연을 끊지 못했네]

십팔년래전탁반(十八年來前度伴)[18년 동안 동반자[정희교(鄭希僑)]를 헤아려 보니]

린옹야석진정친(隣翁野釋情親)[이웃 어른과 중생들과도 정답고 친절함이 지극하네]

[의의와 평가]

「한식일재포천묘사」에서 조태억은 관직에 얽매여 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함과 더불어 현재 함께 하고 있는 정희교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부러워하고 있다.

[참고문헌]
  • 『겸재집(兼齋集)』
  • 한국 역대 인물 종합 정보 시스템(http://people.aks.ac.kr)
  • 한국 고전 번역원 한국 고전 종합 DB(http://db.itk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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