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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177
한자 李麟祥
이칭/별칭 원령(元靈)/능호관(凌壺觀)/보산자(寶山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병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10년연표보기 - 이인상 출생
몰년 시기/일시 1760년연표보기 - 이인상 사망
출생지 이인상 출생지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성격 예술인
성별
본관 전주(全州)
대표 경력 음죽 현감(陰竹縣監)

[정의]

조선 후기의 예술인.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령(元靈), 호는 능호관(凌壺觀)·보산자(寶山子). 고조할아버지는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이민계(李敏啓)인데, 이민계는 이경여의 서자(庶子)였다.

[활동 사항]

이인상(李麟祥)[1710~1760]은 조선 후기 시(詩)·서(書)·화(畵)를 갖춘 대표적인 문인 예술가로,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서 1710년에 태어났다. 학통은 김창흡(金昌翕)이재(李縡)로 이어지는 이기절충론(理氣折衷論)을 이어받았다. 1735년(영조 11)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증조할아버지가 서자였기 때문에 본과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후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나가 북부 참봉(北部參奉), 전옥서 봉사(典獄署奉事), 내자시 주부(內資寺注簿) 등을 역임하고 사근역(沙斤驛) 찰방으로 나갔다. 1750년 음죽 현감(陰竹縣監)으로 부임하였는데,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격으로 탐관오리의 부정을 참지 못하고 관찰사와 다툰 뒤 벼슬을 버렸다. 관직에 있는 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 늘 고생하며 지냈다.

이후 평소 좋아하던 단양(丹陽)에 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음죽현 서쪽 설성(雪城)에 종강모루(鍾岡茅樓)를 짓고 은거하며 벗들과 시·서·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자주 교류하던 이윤영(李胤永)·송문흠(宋文欽)·신소(申韶)·윤심형(尹心衡) 등과 가까이 지냈다. 서자 출신이었지만 명문가 출신답게 시문과 학식이 뛰어나 당시 문사들의 존경을 받으며, 후대의 문인과 서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승(師承)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으나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으로 배우고, 특히 17세기 중국 안휘파(安徽派)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대의 이윤영, 후대의 윤제홍(尹濟弘) 등에게 큰 영향을 끼치며, 정수영(鄭遂永)·이재관(李在寬)·김수철(金秀哲)·김창수(金昌秀) 등의 화풍도 여기에 연결되어, 조선 후기 문인 화풍의 한 맥을 이루었다. 문집인 『능호집』의 발문은 김종수(金鍾秀)가 썼고, 행장은 오희상(吳熙常)이 기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능호집(凌壺集)』이 있다. 작품집으로는 「원령첩(元靈帖)」[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과 「능호첩(凌壺帖)」[개인 소장]이 전한다. 이외에도 다수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이인상은 주로 문인 화풍의 소재를 즐겨 그렸다. 「송하독좌(松下獨坐)」[일본 개인 소장]·「수석도 樹石圖」·「설송도(雪松圖)」·「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검선도(劍僊圖)」[이상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수하한담도(樹下閑談圖)」·「강상초루도(江上草樓圖)」[이상 개인 소장] 등이 있다.

사인풍(士人風)의 풍속화로는 「송하수업도(松下授業圖)」[개인 소장] 등이 있다. 진경 산수도는 금강산을 그린 「옥류동(玉流洞)」·「은선대(隱仙臺)」[이상 간송 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그림은 이인상의 곧은 지조와 강개한 성격이 그대로 반영되어 담백하면서도 투명한 색감, 깔끔한 멋과 함께 단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화법은 엷은 먹으로 바림을 하고 농묵으로 굴곡과 윤곽을 짓는 수법을 사용하였으며, 예서체를 응용한 필법을 특기로 하였다. 글씨는 전서체(篆書體)와 예서체(隸書體)에 뛰어났다. 해서체는 안진경(顔眞卿)을 따랐으나, 전서체는 마음이 가는 대로 호기 있게 써서, 당시에도 기(奇)하다고 하고 혹은 허(虛)하다고 평가하였다. 이에 대해 김정희(金正喜)는 “그의 전각은 200년 이래로 따를 자가 없다.”고 하여 이인상의 문자향을 높게 평가하며 상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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