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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92
한자 李思儉
이칭/별칭 공소(恭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가양리 213-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전병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81년연표보기 - 이사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05년 - 이사검 무과에 급제한 이후 사직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08년 - 이사검 세자 양녕 대군이 경축 사신으로 명나라에 갈 때 수행
활동 시기/일시 1418년 - 이사검 충녕 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태종의 명으로 보좌
활동 시기/일시 1419년 - 이사검 황해도 수군첨절제사에 이어 조전 절제사제수되었다가 파직
활동 시기/일시 1420년 - 이사검 조전 절제사 복귀
활동 시기/일시 1426년 - 이사검 상호군으로 함길도에 가서 명나라에 바칠 매를 잡으라는 명을 받음
활동 시기/일시 1429년 - 이사검 좌군 첨총제·경상 좌도 처치사·공조 참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32년 - 이사검 판의금부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34년 - 이사검 중추원부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35년 - 이사검 동지중추부사로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동지중추원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38년 - 이사검 성절을 하례하고 돌아오라는 명을 받음
활동 시기/일시 1439년 - 이사검 사복시 제조 제수
몰년 시기/일시 1446년연표보기 - 이사검 사망
추모 시기/일시 1446년 - 이사검 공소 시호 받음
묘소|단소 이사검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가양리 213-4
성격 무신
성별
본관 양성(陽城)
대표 관직 지중추원사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무신.

[가계]

본관은 양성(陽城). 증조할아버지는 첨의평리 이나해(李那海)이고 할아버지는 시중 이춘부(李春富)이다. 아버지는 개성 유후 정절공(靖節公) 이옥(李沃)이고, 어머니는 찬성사 홍상재(洪尙載)의 딸이다. 부인은 서보(徐補)의 딸인 이천 서씨(利川徐氏)로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이조 좌랑 이휘(李徽)이다. 첫째 딸은 예문관 직제학 김맹헌(金孟獻)에게, 둘째 딸은 사직 장오(張俣)에게, 셋째 딸은 이조 좌랑 신영손(辛永孫)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이사검(李思儉)[1381~1446]은 천성이 관후(寬厚)하고 직무에 종사하매 게으름이 없었다. 1405년(태종 5) 무과에 급제하여 사직(司直)에 임명되었고, 1408년(태종 8) 세자 양녕 대군(讓寧大君)이 경축 사신으로 명나라에 갈 때 수행하였다. 이때 양녕 대군의 난잡한 행동을 충고하여 미움을 받았다. 1418년(태종 18)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 대군(忠寧大君)[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태종의 명으로 그를 보좌하였다. 그 후 여러 번 승진하여 상호군에 이르렀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평산(平山)에 거주하였다.

1419년(세종 1) 왜구가 비인현(比仁縣)에 쳐들어와 병선(兵船)을 불사르는 등 노략질을 저지르자 황해도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되어 진압하였다. 같은 해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로 황해도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중 왜구가 식량을 요구하면서 교묘하게 싸움을 하지 않는 술책을 써오자 이들을 강력하게 물리치지 않은 죄로 옹진(甕津)에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복귀하였다.

1426년(세종 8) 상호군으로 함길도에 가서 명나라에 바칠 매를 잡으라는 명을 받았다. 이듬해 상호군으로 진응사(進鷹使)가 되어 매를 가지고 명나라로 가다가 요동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매가 죽어 버렸다. 그러자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죽은 매를 가지고 북경의 궁궐에 가서 중국 황제에게 조선 왕의 예를 그르쳤음을 대신 사죄하였다. 명나라 황제가 이를 칭찬하고 기특하게 여겨 장군모(將軍帽)를 하사하였다.

1429년(세종 11) 좌군 첨총제·경상 좌도 처치사를 지내고 공조 참판이 되었다. 1432년(세종 14) 판의금부사가 되고, 1434년(세종 16) 중추원부사에 올랐으며,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8년(세종 20) 성절(聖節)을 하례하고 돌아오라는 명을 받았으며, 같은 해 왜구에 대한 방비책을 건의하였다. 그 내용은 왜관을 옮길 것, 진관 설치를 조정할 것, 병선(兵船)을 증강할 것, 병기(兵器)의 검열을 철저히 할 것 등이었다. 1439년(세종 21) 이후 사복시 제조를 겸임하며 태안(泰安)과 거제(巨濟)에 목장 설치를 건의하는 등 국가의 마정(馬政)을 총괄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가양리 213-4번지에 있다. 묘 앞의 장군석은 특이한 모자를 쓴 형상인데,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장군모를 모방한 것이라 전한다. 포천시 향토 유적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이사검이 사망하자 조정에서 하루 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조부(弔賻)와 치제(致祭)를 하였다. 시호는 공소(恭昭)인데, 집사(執事)함이 견고한 것을 공(恭)이라 하고, 용의(容儀)가 공미(恭美)한 것을 소(昭)라 하여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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