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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72
한자 趙鎭寬
이칭/별칭 유숙(裕叔), 가정(柯汀), 효문(孝文)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39년연표보기 - 조진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62년 - 조진관 생원 진사시 합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08년 - 조진관 기로소 입소
몰년 시기/일시 1808년 윤5월 15일연표보기 - 조진관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20년 3월 23일 - 조진관 효문 시호 받음
출생지 조진관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부임|활동지 광주 부윤 - 경기도 광주시
부임|활동지 개성 유수 -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부임|활동지 한성부 우윤 - 서울특별시
묘소|단소 조진관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풍양
대표 관직 의정부 좌참찬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유숙(裕叔), 호는 가정(柯汀). 증조할아버지는 돈령부 도정 조도보(趙道輔)이고,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조상경(趙尙絅)이며, 아버지는 역시 이조 판서를 지낸 조엄(趙曮)이다. 어머니는 홍현보(洪鉉輔)의 딸인 풍산 홍씨(豊山洪氏)이고, 부인은 홍익빈(洪益彬)의 딸인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인 조만영(趙萬永)의 딸이 익종 비인 신정 왕후(神貞王后)이다.

[활동 사항]

조진관(趙鎭寬)[1739~1808]은 1762년(영조 38)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71년(영조 47)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775년(영조 52) 세자익위사 시직이 되었는데, 이때 영조가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구현시(求賢試)를 실시하였으나 몇 번의 시사(試士)에도 마땅한 인재가 없자 음서(蔭敍)[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공로로 관직에 진출함] 출신자 중에서 직접 가려 조진관을 선발하였다. 이후 내직, 외직을 두루 거친 뒤 동부승지에 특별히 발탁되었고, 곧 이어 광주 부윤에 제수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아버지 조엄이 당시 권력을 좌우하던 홍국영(洪國榮)과 갈등을 보이자 이를 변명하기 위해 신문고를 치거나 칼로 몸을 찔러 자살을 기도하는 등의 행동을 하다가 의금부에 갇히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 아버지 조엄이 김해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홍국영이 권력을 잃은 뒤 아버지에게 직첩(職牒)이 환급되었고, 조진관에게도 군직(軍職)이 제수되었다가 곧이어 돈령부 도정에 제수되었다.

1793년(정조 17) 종2품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면서 한성부 우윤과 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이때 조진관은 이전에 있었던 일이 억울하다며 몇 차례 재조사를 요구하였고, 정조가 특별히 어사 이상황(李相璜)에게 조사하도록 하였다. 1794년(정조 18) 한성부 우윤을 거쳐 동지의금부사, 형조와 병조의 참판, 대사간을 지냈고, 1795년(정조 19)에는 형조 참판과 동지춘추관사를 거쳐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회갑을 맞아 신하들이 전문(箋文)을 올릴 때 승지로 공을 세워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급하였다. 이후 도승지를 지낸 뒤 1796년(정조 20)에는 개성 유수로 임명되어서는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고 지역 인재를 추천하였다.

1797년(정조 21) 경상도 관찰사와 전라도 관찰사에 계속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급하였다. 이어 1798년(정조 29) 지춘추관사와 도총부 도총관, 지의금부사,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낸 뒤 호조판서에 제수되었고, 1800년(정조 24)에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국장도감 당상으로 차출되었고, 이어 이조 판서를 거쳐 대사헌과 주교사 당상을 역임하였으며,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급되었다.

1801년(순조 1) 지돈령부사를 거쳐 형조 판서와 의정부 우참찬을 역임하였고, 병조 판서에 제수되어서는 정조가 친위 부대로 창설한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였다. 1802년(순조 2) 호조 판서 겸 예문관 제학을 지냈고, 이어 숭정대부로 승급하였다. 1803년(순조 3)에는 이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비롯해 판의금부사를 거쳐, 1804년(순조 4)에 의정부 좌참찬과 홍문관 제학, 예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호조판서 재직 시 정조의 능인 건릉(健陵)의 보수에 공이 있어 숭록대부로 승급하였고, 1805년(순조 5)에는 정순 왕후(貞純王后) 옥책문(玉冊文)을 찬술해서 올린 공으로 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1808년(순조 8) 신하로서는 영광인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하였다가 같은 해 윤5월 15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조진관은 평소 『주역(周易)』 연구에 주력하여 침식(寢食)을 잃을 정도였다고 하며, 『역문(易問)』을 저술하기도 할 정도로 평생을 주역 연구에 매달렸다. 『역문』은 『주역』의 각종 문제를 도합 18개 항목으로 분류, 여러 모로 논증하고 토의한 글로, 아들 조인영(趙寅永)이 쓴 발문(跋文)에 따르면 당대까지 역학(易學)을 말하는 학자들이 흔히 언급하지 아니한 부분을 많이 해명해 놓은 글이라고 하였다. 이밖에도 천문과 율(律)·수(數)에도 해박하였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있었다.

저서로 『가정유고(柯汀遺稿)』가 있다. 『가정유고』는 10권 5책으로, 권1과 권2는 시(詩)가 수록되었고, 권3은 「사한성우윤소(辭漢城右尹疏)」 등 소(疏) 18편, 권4는 상소와 계(啓), 의(議) 등이 수록되었다. 권5는 개성 숭절사에 모셔진 임진왜란 때의 삼충위(三忠位)에 관한 기록의 「삼충록서(三忠錄序)」와 같은 서(序)나 기(記)·사(辭) 등 8종의 문장을 수록하였다. 권6부터 권7까지는 인물에 대한 묘표(墓表)와 묘갈문(墓碣文), 신도비명(神道碑銘), 시장(諡狀), 전(傳) 등을 수록하였고, 권9와 권10은 『역문』으로 구성되었다.

[묘소]

묘는 사망 직후에는 아버지 묘가 있는 강원도 원주에 있었으나, 후에 이장해서 영평현 광석리로 옮겼다가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로 다시 옮겼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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