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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64
한자 鄭希登
이칭/별칭 원룡(元龍)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두문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06년연표보기 - 정희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28년 - 정희등 진사시 합격
몰년 시기/일시 1545년연표보기 - 정희등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47년 - 정희등 정미사화 때 죄가 추가되어 가산 적몰
추모 시기/일시 1568년 - 정희등 신원되어 이조 판서 추증
출생지 정희등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기지리 두문동
묘소|단소 정희등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동래(東萊)
대표 관직 세자시강원 우필선

[정의]

조선 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원룡(元龍). 아버지는 종부시 첨정 정구(鄭球)이다. 승지 정원(鄭源)의 종질(從姪)이다.

[활동 사항]

정희등(鄭希登)[1506~1545]은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두문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실천함이 독실하고 식견이 정박(精博)하였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글을 읽었고, 비록 급한 일을 당하더라도 일과는 변치 않고 시행하였다. 1528년(중종 2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34년(중종 29)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보직되었다. 이어 정언으로 재직할 때 부인이 죽었다. 김안로(金安老)가 그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자 “차라리 일생 동안 장가를 들지 못할지언정 권세 있는 집의 사위는 되지 않겠노라.” 하며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 김안로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도사·광흥창 수(廣興倉守)·사복시 첨정 등의 한직을 전전하다가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제거된 뒤 수찬·정언·교리·헌납 등 청직과 요직에 중용되었다.

1541년(중종 36) 지평으로 그해의 흉황(凶荒)과 수령의 폐해를 조사하기 위하여 별견어사(別遣御史)로 파견되었고, 1544년(중종 39) 세자시강원 우필선·장령을 지냈다. 이듬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권세를 잡게 된 소윤의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의 윤임(尹任)·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제거하려 하였을 때 극력 반대하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때 대사헌 민제인(閔齊仁)이 수렴청정을 하는 대비의 밀지를 받아 악을 제거하는 것이니 동참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자, 대신의 거취는 조정의 큰일인데 어찌 내전(內殿)의 밀지로 처리할 것이냐고 항의하였다. 또 이기가 화를 내며 “네가 최복(衰服)[아들이 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상중에 입는 상복]을 벗지 않고 재궁(梓宮)을 향해 엎드려 있으면 감형이 될 줄 아느냐.” 하고 연거푸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으나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용천(龍川)으로 유배 가던 중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이에 아버지인 정구(鄭球)가 노상으로 나와 작별을 하며 “어려서부터 정직한 행실이 있더니 바른 길을 가다가 죄를 당한들 무엇이 부끄러우랴. 이제 영결하게 되니 할 말이 없구나. 장하다. 내 아들아.” 하였다. 가산 역시 몰수되어 가족이 염습을 할 수 없어 시체 옆에서 울고만 있는데 경향 각지 사람이 면포 300필을 수습하여 장례를 도왔고, 장례 날에는 영남과 호남의 선비 100여 명이 와서 곡하고 부의를 전하였다. 1547년(명종 2) 정미사화 때 죄가 추가되어 가산을 적몰 당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 있다. 묘갈명(墓碣銘)은 월사 이정구(李廷龜)가 지었다.

[상훈과 추모]

1568년(선조 1) 신원되어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적몰된 가산도 환급 받았다.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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