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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58
한자 鄭球
이칭/별칭 대명(大鳴), 괴은(乖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71년연표보기 - 정구 출생
거주|이주지 정구 은거지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부임|활동지 김산 군수 - 경상북도 김천시
묘소|단소 정구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동래(東萊)
대표 관직 김산 군수

[정의]

조선 전기 포천 지역에 은거한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명(大鳴), 호는 괴은(乖隱). 고조할아버지는 호조 참의 정절(鄭節)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비안 현감 정자순(鄭子順)이다. 할아버지는 청주 목사 정결(鄭潔)이며, 아버지는 무안 현감 정유의(鄭有義)이다. 어머니는 조찬(趙瓚)의 딸인 양주 조씨(楊州趙氏)이고, 부인은 김중문(金仲文)의 딸인 광주 김씨(光州金氏)이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정구(鄭球)[1490~?]는 1501년(연산군 7)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10년(중종 5)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분관(分館)되었다. 분관이란 문과 급제자에게 임시로 권지(權知)라는 직함을 주어 승문원과 성균관·교서관 등에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1512년(중종 7)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는데, 검열은 사관직으로 사실대로 기록하고 불의·불법과는 일체 타협을 용납하지 않았다. 외손인 조경(趙絅)에 의하면, 이때의 강직한 자세로 인해 권세가들의 미움을 받고 지방 관직으로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1516년(중종 11)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이후 단천 군수를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두문동이라는 이름은 정구가 은거하면서 생겨난 명칭이다. 정구는 조정에서 나오라고 부르자 다리뼈 연화(軟化)로 앉은뱅이가 되어 움직일 수 없다 하고 일체 문밖에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집안 식구들도 그런 줄로 생각하였는데, 그 후 18년 만에 아들 정희등(鄭希登)의 두 번째 자부가 현구 고례(見舅姑禮)[신부가 처음으로 시부모를 뵙는 예]할 때 정구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서 비로소 거짓 앉은뱅이 노릇을 한 줄 알았다. 1525년(중종 20) 김산 군수와 개천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저술]

절의(節義)와 함께 문명(文名)이 높았는데, 평소 방안에 들어앉아 글만 즐기고 문장을 벗 삼아 지냈다. 저서로 『괴은유고(乖隱遺稿)』를 남겼다. 『괴은유고』는 2권 1책으로, 권수에 1541년(중종 36) 성세창(成世昌)이 지은 서문이 있다. 본문의 내용은 모두 시(詩)로, 권1에는 80수가, 권2에는 66수가 수록되어 있다. 시는 주로 홀로 있을 때의 심경을 표현하거나 유람지의 풍광을 읊은 작품이 대다수이며, 이밖에 「기희등부시(寄希登赴試)」는 과거를 보러 간 아들 정희등을 걱정하며 지은 것이고, 「관희등시초문희부(觀希登試草文喜賦)」는 아들 정희등이 과거 시험을 볼 때 지었다는 초고문을 보고 급제 소식을 기다리는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 있다. 묘지명은 포천 출신이며 외손인 조경이 찬술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4.24 생년 오류 수정 1471년을 1490년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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