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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56
한자 李後山
이칭/별칭 자고(子高), 설파(雪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음현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이후산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75년 5월 9일연표보기 - 이후산 사망
부임|활동지 부여 현감 - 충청남도 부여군
부임|활동지 황해도 관찰사 - 황해도
부임|활동지 성주 목사 - 경상북도 성주군
부임|활동지 충청도 관찰사 - 충청도
부임|활동지 진주 목사 - 경상남도 진주시
부임|활동지 청풍 군수 -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부임|활동지 강원도 관찰사 - 강원도 원주시
부임|활동지 회양 부사 - 강원도 회양군
부임|활동지 한성부 좌윤 - 서울특별시
부임|활동지 개성 유수 -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묘소|단소 이후산 묘소 -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음현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용인(龍仁)
대표 관직 개성 유수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자고(子高), 호는 설파(雪坡). 증조할아버지는 병조정랑을 지내고 홍문관 직제학에 추증된 이신충(李藎忠)이고, 할아버지는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된 이계인(李啓仁)이다. 아버지는 사간원 대사간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된 이사경(李士慶)이며, 어머니는 성희익(成希益)의 딸인 창녕 성씨(昌寧成氏)이다. 부인은 김수현(金壽賢)의 딸인 풍산 김씨(豊山金氏)이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이순악(李舜岳), 둘째 아들은 이선악(李宣岳), 셋째 아들은 이두악(李斗岳)이다. 맏딸은 장령 윤우정(尹遇丁)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참판 이하진(李夏鎭)에게 시집갔으며, 셋째 딸은 군수 서문중(徐文重)에게 시집갔고, 넷째 딸은 현감 박선(朴銑)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이후산(李後山)[1597~1675]은 1616년(광해군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23년(인조 1)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1628년(인조 6) 현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1631년(인조 9) 의금부 도사, 세자익위사 세마를 거쳐 시직과 부솔 등을 지냈다. 1638년(인조 16) 부여 현감에 제수되었으며, 이 해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40년(인조 18) 비변사 낭청에 제수되었고, 1641년(인조 19) 병조 좌랑, 1642년 (인조 20)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병조 정랑과 성균관 직강 등을 역임하였다.

1643년(인조 21) 겨울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되어 중국 심양(瀋陽)에 갔다가 다음 해인 1644년(인조 22) 복명하였다. 곧 이어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체직(遞職)되어 능주 목사에 제수되었으나 어머니의 병 때문에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다시 장령과 종부시정, 성균관 사성을 지냈고, 가을에 안변 부사로 부임하였다. 안변 부사 재직 시 관청 청사를 수선하고 교량을 수리하였으며, 미곡(米穀)과 어염(魚鹽), 땔나무, 꼴 등의 작은 것까지도 모두 문서에 기록하도록 하여 이서(吏胥)가 농간을 부릴 수 없게 하였다. 또한 유학(儒學)에 힘쓰도록 권장하고 군사를 교련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년) 어머니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장령과 세자시강원 필선에 제수되었고, 1651년(효종 2) 세자의 관례와 책례에 차출되었다. 이때의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고 병조 참지에 제수되었다. 이어 승정원의 동부승지와 우부승지를 거쳐 1653년(효종 4)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관찰사 재직 시 도내에 여역(厲疫)[전염성 열병을 통틀어 이름]이 크게 발생하자 관향곡을 꺼내어 진휼하고 훈련도감과 각 아문의 둔전을 폐지하는 등 조치를 다하였다.

1654년(효종 5)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성주 목사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 옮겼다. 이후산이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할 당시에는 병사가 청주 목사를 겸임하고 수사가 보령 부사를 겸임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로 인해 두 고을 모두 쇠잔해지자 각각의 고을에 목사와 현감을 두고 병사와 수사는 군정만 관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1656년(효종 7) 형조참의에 제수되었고, 1657년(효종 8) 진주 목사에 제수되었다가 바로 다시 형조참의를 거쳐 승지로 옮겨 갔다. 1658년(효종 9) 청풍 군수에 제수되었는데, 곧 청풍군이 청풍부로 승격되면서 청풍 부사가 되었다. 1660년(현종 1)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해서는 노산군(魯山君) 묘의 수호군을 다시 설치하고 벌채를 금지하였다. 임기 만료 후 조정에 들어와 호조참의와 승지를 지냈고, 1662년(현종 3) 회양 부사에 제수되었다.

1663년(현종 4)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조치한 일로 파직되었다가 1665년(현종 6) 승지에 제수되었다. 이후 계속해서 형조 참의와 장례원 판결사, 호조참의,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에는 흉년으로 수확이 줄어든 정도와 굶주린 백성의 수를 조정에 보고하고, 전세(田稅)와 대동미 및 훈련도감의 둔전에서 거둔 것을 그대로 남겨 둘 것을 청하고, 또 경창(京倉) 및 충주와 영남의 곡식을 옮겨 줄 것을 청하였으며, 각 아문의 염분세(鹽盆稅)와 선세(船稅) 및 무세(巫稅) 등의 포(布)를 흩어서 곡식을 사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또한 무신 수령이 파견되던 이천 지역에 문신 수령 파견을 요청하였고, 고성에 영장(營將) 파견을 중지하고 강릉에 두기를 요청하였다.

1667년(현종 8) 조정으로 들어와 병조참의와 승지, 호조참의, 공조참의를 지냈고, 1672년(현종 13)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고 한성부 좌윤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형조참판과 호조참판, 개성 유수를 지냈다. 개성 유수로 있을 때는 지역 내 백성 가운데 준수한 자를 뽑고 글재주가 뛰어난 유사(儒士) 몇 사람을 가려서 훈장이라 이름 붙이고 가르치게 한 다음 녹봉을 지급하여 교육을 진흥시켰다. 또한 고려 태조의 능에 배속된 왕씨의 수직관(守直官)에게 녹봉을 후하게 지급하였다.

1674년(현종 15)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영예를 얻었고, 인선 왕후현종의 국상 때는 백성의 부담이 불균등한 것이 폐단임을 알고 한성부 내 호수(戶數)를 조사해 비율대로 부담을 지도록 하여 역을 균일하게 하였다. 1675년(숙종 1)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 인선 왕후의 연제일(練祭日)에 곡반(哭班)에 나아갔다가 병을 얻어 5월 9일 사망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음현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송시열(宋時烈)이 찬하였고, 묘지명(墓誌銘)은 박세채(朴世采)가 찬하였으며, 행장(行狀)은 윤증(尹拯)이 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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