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37
한자 李成吉
이칭/별칭 덕재(德哉), 창주(滄洲)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명산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전병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2년연표보기 - 이성길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21년연표보기 - 이성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 - 이성길 신도비 건립
묘소|단소 이성길 묘소 -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명산리
신도비 이성길 신도비 -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명산리
성격 문신|화가
성별
본관 고성(固城)
대표 관직 병조 참판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화가.

[가계]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덕재(德哉), 호는 창주(滄洲). 아버지는 참봉 이정려(李精瓈)이다.

[활동 사항]

이성길(李成吉)[1512~1621]은 성품이 호방하여 세상에 구애됨이 없었다. 17세에 출입을 삼가고 독서에 열중하여 경사(經史)에 통독하였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장원하여 진사가 되고, 이어 증광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 이양원(李陽元)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한양에서 철수하게 되자 아버지와 함께 관북(關北)으로 갔다. 경성에 이르러 당시 북평사 정문부(鄭文孚)가 의병을 일으키자 적극 동참하였다. 경성과 회령 일대에서 반란군 국경인(鞠景仁) 등을 처단하고 왜적을 무찔렀다. 다시 명천과 길주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격파하였고, 12월에는 임명(臨溟)과 쌍포(雙浦)에서 싸워 대승하였다. 다음 해 종성으로 쳐들어온 여진족을 물리치고 단천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대를 철퇴시켜 관북을 탈환하니, 이른바 ‘북관 대첩(北關大捷)’이 바로 이것이다. 이 전공으로 수성도 찰방에 제수되었다.

1594년(선조 27) 병조좌랑에 임명되었고, 1596년(선조 29) 북청 판관에 전임되었다가 함흥 판관이 되었다. 1597년(선조 30)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였다. 다시 1601년(선조 34) 사복시 첨정, 여산 군수가 되었고, 1602년(선조 35) 형조정랑이 되어 암행어사로 함경도를 순회하였다. 1603년(선조 36) 왕명으로 문무관을 모아 놓고 친시(親試)를 보았는데, 수석을 하여 말 한 필을 하사 받았다. 그해 6월 양산 군수로 나아갔다. 이후 합천 군수와 덕원 부사를 거쳐 1607년(선조 40) 성균관 전적으로 중앙에 복귀하였다. 1609년(광해군 1) 호조정랑을 지냈고, 1611년(광해군 3) 판결사가 되었으며, 1613년(광해군 5) 동지사로 중국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이후 훈련 도정, 분조(分朝)의 병조참의,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다가 금교역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임진왜란 당시 쌍포에서 싸워 대승한 것을 화폭에 그린 「쌍포 승첩도(雙浦勝捷圖)」가 전한다. 진중에서 그린 「무이 구곡 도권(武夷九曲圖券)」도 전하는데, ‘무이 구곡’이란 중국의 복건성과 강서성 경계에 높이 1300m 되는 무이산을 중심으로 무이 산맥이 형성되어 곳곳에 명승지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아홉 구비가 뛰어나다고 하여 유래한 이름이다. 성리학의 원조 송나라 주자(朱子)도 천하 절경인 이곳 계곡에 운곡 서원(雲谷書院)을 세우고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강론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화가가 이 무이 구곡을 주요 소재로 다루었다. 이성길의 「무이 구곡 도권」은 필치가 정교하고 섬세하면서도 활력이 넘쳐서 선경(仙境)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다는 평가를 받는 명작이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명산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80년 후손들이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명산리에 신도비를 세웠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