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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05
한자 宋徵啓
이칭/별칭 계인(季仁)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병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90년연표보기 - 송징계 출생
몰년 시기/일시 1722년연표보기 - 송징계 사망
묘소|단소 송징계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여산(礪山)
대표 관직 공조판서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계인(季仁). 증조할아버지는 예조 참의 송극인(宋克認)이고, 할아버지는 좌승지 송시철(宋時喆)이다. 아버지는 간성 군수 송광속(宋光涑)이고, 외할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이다. 아내는 심호(沈浩)의 딸이고, 아들은 송준명(宋準明)이며, 형제로 송징설(宋徵卨)과 송징이(宋徵履) 등이 있다.

[활동 사항]

송징계(宋徵啓)[1690~1722]는 1723년(경종 3) 식년시 문과 병과 4위로 급제하고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었다. 1728년(영조 4)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1730년(영조 6)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732년(영조 8)부터 1738년(영조 14)까지 사헌부 지평, 사헌부 장령, 사헌부 집의, 홍문관 수찬, 홍문관 교리, 홍문관 응교, 사간원 헌납,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가문이 좋고 재주와 품행이 뛰어난 문과 급제자만 임명하는 삼사(三司)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국왕의 간쟁, 관리의 탄핵, 풍속의 시정 등 국정 전반에 대한 강직한 언론 활동을 전개해 국왕을 보필하였다. 1739년(영조 15) 중종 비(妃) 신씨(愼氏)의 묘를 봉릉(封陵)할 때 온릉봉릉도감(溫陵封陵都監)의 도청(都廳)으로 참여하였다. 그 해 승정원 승지와 사간원 대사간으로 승진하여, 1754년(영조 30)까지 간혹 체차(遞差)되기는 했지만 사간원의 수장으로 오랫동안 재직하였으며, 1763년(영조 39) 공조 참판을 지냈다.

1770년(영조 46) 영조는 “오늘에 한 가지 어려운 일을 시행하고 내일에 또 한 가지 어려운 일을 시행한다면, 뜻이 있는 일은 끝내 이루어 낼 것이다.”라는 그의 말을 인용하며 선무군(選武軍)의 보포(保布)를 절반으로 감축한 일화가 있다. 1771년(영조 47) 공조 판서로 승진하였고, 이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정치를 자문하였다. 1772년(영조 48) 8월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장파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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