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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01
한자 宋克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3년연표보기 - 송극인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35년연표보기 - 송극인 사망
묘소|단소 송극인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여산(礪山)
대표 관직 장례원 판결사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신백(愼伯), 호는 정곡(靜谷). 외할아버지는 풍저 창수(豊儲倉守) 윤확(尹確)이고,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 송초(宋礎)이다. 원주 목사 송시철(宋時喆)이 아들이다.

[활동 사항]

송극인(宋克訒)[1573~1635]은 6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자력으로 공부해서 30세 되던 해인 1602년(선조 35)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과거를 주제한 이는 심희수(沈喜壽)였다. 승문원에 보직되었다가 전적·평사(評事)·검열·봉교 등을 거쳐 북도 평사(北道評事)에 임명되었는데, 어머니의 나이가 많음을 들어 체직을 청하여 형조좌랑·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사간원 정언을 거쳐 당진 현감으로 나갔다가 돌아와 예조좌랑이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실록 낭청을 겸하여 병조 좌랑과 예조정랑을 오갔고, 세자시강원 문학과 지평·장령을 거쳐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승진하여 녹훈 도청(錄勳都廳)을 겸하였으며, 평안도 재상 경차관이 되었으나 실록청에서 유보시켰다. 1612년(광해군 4)에는 동료들에게 경시당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파직을 청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장령으로 있을 때, 대간에서 이항복(李恒福)을 무고하자 이를 반론하다가 직강으로 강등되었다. 얼마 후 사간이 되고 이어서 집의로 옮겼다. 다음 해 사복 시정에 임명되어 필선을 겸하였는데, 이 해에 호서 지방에서 발해시(發解試)[초시]를 주관하면서 입격자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가 많았다. 1615년(광해군 7)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이 나서서 폐모론을 제기하자 이원익(李元翼)이 왕에게 효성을 다하는 도를 권하였는데, 이때 간당들이 거리낌없이 공격하며 그도 공격을 당하였다.

1616년(광해군 8) 군기 시정과 사재 감정이 되었고, 다음 해 북관 구황 어사(北關救荒御史)의 소임을 받았으나,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면직되었다. 1620년(광해군 12) 모친상을 벗고 사예·통례로 옮겼다가 비변사의 추천으로 동래 부사로 나아가려고 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명나라 장수 유유은(劉濡恩)의 접반사가 되었다가 들어와 병조 참의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직후 울산 부사가 되어 다스림에 지성을 기울이므로 떠난 뒤에 백성이 사모하여 비석을 세웠다. 1625년(인조 3) 행사정 가참지(行司正假參知)에 낙점받자 칭병하고 나아가지 않자 병조에서 이에 대한 추고를 건의하기도 하였다. 1626년(인조 4) 중화 부사에 제수되어 조사(詔使)에게 받은 사첩(謝帖)과 초록팽단령(草綠彭端領) 등을 보고하였다.

1627년(인조 5) 돌아와 이듬해 공조 참의가 되어 동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때의 사행로는 바닷길을 이용하였는데, 모문룡(毛文龍)이 사람을 시켜 바다에서 일행의 은과 인삼을 빼앗아 돌아갔다. 이에 신민일(申敏一)이 송극인의 책임을 물어 파직하고 정숙 옹주(貞淑翁主) 묘 아래에 역위전(驛位田) 1결을 봉안하고 그 집에 사급(賜給)하는 명을 환수하라는 건의를 올렸다.

1628년(인조 6) 공조 참의에 임명되어 진하 동지 성절사(進賀冬至聖節使) 겸 사은사가 되어 바다를 건너 명나라에 갔는데, 이때 사신들이 표류하여 빠져 죽는 경우가 많았으나 침착하게 대처하였다. 돌아와 예조 참의를 거쳐 영광 군수를 제수하였는데, 대각에서 꺼리어 사임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다시 동지 겸 성절사(冬至兼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김상헌(金尙憲)이 송시(送詩)를 지어 이별의 아쉬움을 전하였다.

1629년(인조 7) 영광 현감으로 있으면서 신상연(申尙淵)의 모역(謀逆)을 듣고도 감사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아 나국정죄(拿鞫定罪)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용양위 사직으로 있다가 선산 부사를 거쳐 1634년(인조 12) 장례원 판결사가 되었으며, 가승지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위로사로 파견되었다. 1635년(인조 13) 부평 부사로 나갔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사람됨이 크고 얼굴이 중후하였으며, 성품이 관대하고 늘 조심하여 바르게 행동하였으므로 중망(重望)을 받았다는 평이 있다. 말년에 남산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지어 좌우에 도서를 비치하고, 돌을 쌓아 뜰을 만들어서 꽃과 나무를 심고 날마다 그 사이에서 읊조리며 얽매임 없이 세월을 보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63세로 사망하자 인조의 부의(賻儀)가 내려졌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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