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00
한자 成海應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초가팔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60년연표보기 - 성해응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39년연표보기 - 성해응 사망
출생지 성해응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초가팔리
묘소|단소 성해응 묘소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성격 실학자|문신
성별
본관 창녕(昌寧)
대표 관직 규장각 검서관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실학자이자 문신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용여(龍汝), 호는 연경재(硏經齋). 할아버지는 장수도(長水道) 찰방(察訪) 성효기(成孝基)이고, 아버지는 문장으로 정조의 인정을 받은 성대중(成大中)이다. 어머니는 진사 이덕로(李德老)의 딸인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아들은 성헌증(成憲曾)이다.

[활동 사항]

성해응(成海應)[1760~1839]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9세 때 『율곡전서(栗谷全書)』를 읽고 평생 이이(李珥)를 흠모하였다. 1783년(정조 7)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88년(정조 12)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내각에서 근무하면서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유하고 각종 서적을 광범위하게 섭렵하며 학문의 바탕을 이룩하였다. 1790년(정조 14) 정조가 규장각에 명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편제하였는데, 여기에 깊이 참여하여 권수의 범례를 작성하였다.

1801년(순조 1)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를 거쳐 금정 찰방이 되었다가 1803년(순조 3) 음성 현감을 지냈다. 1813년(순조 13) 정조의 어제(御製)를 간행할 때 세 차례 규장각에 들어갔다가 일이 끝난 뒤인 1815년(순조 15)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아들 성헌증의 임지인 충청도 목천과 고향에 거주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앞서 1788년 정조가 아버지 성대중과 이의준(李義駿)·이서구(李書九)에게 명하여 존주(尊周)에 관한 글을 모아 편찬하게 했을 때 그도 보좌하였는데, 사직 후 이서구의 위탁을 받아 정리 끝에 1825년(순조 25) 『존주휘편(尊周彙編)』의 편수를 마쳤다.

[학문과 저술]

성해응은 학문 연구의 방법으로 옹방강(翁方綱)과 같은 청나라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훈고(訓詁)·고증(考證)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번쇄하고 지리한 고증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한학(漢學)과 송학(宋學)을 합하여 그 요점을 잡아 박문약례(博文約禮)의 교훈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바의 요점이었다. 그러한 견지에서 당시 조선의 학자들이 오로지 의리만을 숭상하고, 정이(程頤) 형제나 주희(朱熹)만을 신봉하여 다른 학설을 배척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특히 고증학을 비판하는 홍석주(洪奭周)와 논변을 벌였는데, “고증학자들이 의리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단지 명물도수(名物度數) 같은 말단만을 인증한다.”는 홍석주의 비판에 대해 고증의 방법을 변호하고 한(漢)·송(宋)의 절충을 주장하여 재래의 편파적인 학풍에 반대하는 논리를 폈다.

성해응의 학문은 방대한 문집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리·풍속·서적, 심지어 금수·곤충에 이르기까지 넓은 폭을 보이지만,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이 사람에게 절실한 학문으로서 서로 표리가 된다고 하여 두 학문에 진력하였다. 그중에서도 경학에 주력하여 『예기(禮記)』와 『시경(詩經)』에 대한 저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역사 연구는 체계를 갖춘 큰 저술은 없으나 우리나라의 전승과 지리, 중국의 역대 제왕과 왕실 및 유민(遺民), 조선과 중국의 관계, 풍속과 법제, 경제에 대한 자료를 남겼다.

실학 전성기에 활동하여 조선 후기 주자학에 대한 발전적 비판 내지 저항이 줄기차게 계속될 때, 경학의 이념적인 굴레를 탈피하려는 박학적(樸學的)·고증학적 경향을 보인 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저서로 본집, 외집, 별집으로 구성된 『연경재전집』을 남겼다. 이밖에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 『주한잡사고(周漢雜事考)』,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 『일민전(逸民傳)』, 『초사담헌(草榭談獻)』, 『난실서종(蘭室書種)』, 『연경재서종(硏經齋書種)』 등이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에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5.09 인물 관계 오류 수정 증조할아버지는 ~ 성효기 -> 할아버지는 ~ 성효기
이용자 의견
박** [가계] 부분에서 ‘증조할아버지는 내섬시 직장 성효기(成孝基)이고’에서 ‘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로 고쳐야 한다.
  • 답변
  • 디지털포천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의 의견을 검토하여 인물 관계 오류를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05.09
박** 성효기의 관직도 ‘내섬시 직장’이 아니라 장수도(長水道) 찰방(察訪)으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연경재가 지은 「先府君墓誌」와 연경재의 조카 성우증이 지은 「硏經齋府君行狀」에 의하면 연경재의 조부 성효기는 ‘찰방’을 지낸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성효기는 1756년 3월에 장수도 찰방에 제수되었다.(《승정원일기》 영조 32년 3월 12일(경진))
  • 답변
  • 디지털포천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의 의견을 검토하여 해당 내용을 추가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05.09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