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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511
한자 交州道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김우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263년연표보기 - 동주도에서 교주도로 개칭
폐지 시기/일시 1314년연표보기 - 교주도에서 회양도로 개칭
관할 지역 교주도 - 경기도 포천시

[정의]

고려 후기 포천 지역을 관할하던 지방 행정 구역.

[개설]

교주도(交州道)는 고려 시대의 5도(道) 중 하나이다. 이 지역은 춘주도(春州道)·동주도(東州道)·교주도 등으로 명칭이 계속 바뀌어 나가는데, 이는 해당 중심 주의 위상이 변화하면서 바뀐 것으로 추측된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교주도는 고려 초 행정 구역 정비 과정에서 5도 체제가 성립되면서 하나의 행정 구역으로 자리 잡았으며, 1263년(원종 4) 비로소 교주도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의 교주도 항목에는 “교주도는 원래 맥(貊)의 땅인데 후에 고구려의 땅으로 되었다가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렀다. 성종 14년에 전국을 10개 도로 나눌 때에 춘주(春州) 등 군현을 삭방도(朔方道)에 소속시켰으며, 명종 8년에 비로소 춘주도라고 부르다가 후에 동주도로 고쳤다. 원종 4년에 교주도라고 불렀고 충숙왕 원년에 회양도(淮陽道)라고 하였으며, 신우 14년에 대관령 동쪽과 서쪽을 합쳐서 교주 강릉도(交州江陵道)라 하고 충주(忠州) 관할 하에 있던 평창군(平昌郡)을 여기에 소속시켰다. 이 도의 관할 하에 군(郡)이 8개[방어군이 1개, 지사군이 2개, 소속군이 5개 있다], 현이 20개 있다.

교주는 원래 고구려의 각련성군(各連城郡)[각(各)은 객(客)으로도 쓰며 가혜아(加兮牙)라고도 한다]인데, 신라 경덕왕은 연성군(連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이물성(伊勿城)이라고 불렀고, 성종 14년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단련사(團練使)를 두었으며, 현종 9년에 방어사로 고쳤다. 충렬왕 34년에 철령구자(鐵嶺口子)로서 수비상 공을 세웠다고 하여 회주목(淮州牧)으로 승격시켰으며, 충선왕 2년에 전국의 목(牧)을 없애게 되면서 낮추어서 회양부(淮陽府)로 하였다. 이 주에 요해처(要害處)가 2개 있는바 철령(鐵嶺)·추지령(楸池嶺)이 그것이며, 또한 의관령(義館嶺)과 덕진명소(德津溟所)[사전(祀典)에 실려 있다]가 있으며 이 주에 소속된 군이 2개, 현이 4개 있다[交州道 本貊地後爲高句麗所有歷新羅至高麗 成宗十四年 分境內爲十道以春州等郡縣屬朔方道 明宗八年 始稱春州道後稱東州道 元宗四年 稱交州道 忠肅王元年 稱淮陽道辛禑十四年 幷嶺東西爲交州江陵道以忠州所管平昌郡來屬領郡八[防禦郡一知事郡二屬郡五]縣二十. 交州 本高句麗各連城郡[各一作客一云加兮牙] 新羅景德王改爲連城郡 高麗初稱伊勿城 成宗十四年 更今名爲團練使 顯宗九年 改爲防禦使 忠烈王三十四年 以鐵嶺口子把截有功陞淮州牧 忠宣王二年 汰諸牧降爲淮陽府 要害處二鐵嶺楸池嶺又義館嶺德津溟所[載祀典]屬郡二縣四]”라고 하였다.

[내용]

교주도 내에 8개의 군과 20개의 현이 소속되어 있었다. 군에는 방어군이 1개, 지사군이 2개, 소속군이 5개 있었다. 지금 포천 북동부 지역을 포함한 동주가 여기에 소속되어 있었다.

[변천]

교주도는 본래 995년(성종 14)에 구획한 10도 중 하나인 삭방도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후 이 지역은 춘주도, 동주도 등으로 칭해지다가 1263년에 비로소 교주도가 되었다. 이후 1314년에 교주도를 회양도라 고쳤다가 1388년에 다시 강릉도에서 분리된 삭방도를 교주도와 합쳐서 교주 강릉도라 이름 하였다. 1391년(공양왕 3)에 이곳에 소속되어 있던 철원·영평(永平) 등을 분할하여 경기도로 이속하였다. 그러다 1395년에 강원도라 개칭하면서 교주도라는 명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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