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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035
한자 天主敎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포천시
집필자 이계형

[정의]

경기도 포천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

[포천 지역 천주교의 전파]

경기도 포천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한 인물은 홍교만[1738~1801]이다. 한양에 살다가 포천으로 이주한 홍교만은 경기도 양근에 사는 고종 사촌 권일신(權日身)[?~1791] 집을 드나들다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다. 권일신은 1782년(정조 6) 이벽(李蘗)[1754~1786]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했고, 청나라에서 영세를 받고 온 이승훈(李承薰)에게 최초로 영세를 받았다. 그는 천주교에 심취하여 신앙생활에 전념하였고 이존창·유항검 등을 통해 충청도와 전라도에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홍교만은 먼저 입교한 아들 홍인[1758~1802]에게 교리를 배운 뒤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1794년(정조 18) 말에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신부가 한국말을 배우고 활동하기 시작한 무렵인 1795년 부활 대축일에는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그 뒤 홍교만은 미신자 친구들과 교제를 끊고, 자신의 학식을 바탕으로 교리 연구에 매진하였다. 홍교만의 포천 집은 교회 가르침을 들으려고 모여든 교우로 가득하였다. 포천 지역에 복음이 널리 전파된 것은 홍교만의 이러한 노력 덕분이었다.

정조 시기에는 대체로 천주교에 관대했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에는 교회의 조직 체계가 정비되었고,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신자 수가 1만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1801년 정조가 재위 24년 만에 죽자 정순 왕후가 국가 기강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으로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신유박해이다. 1801년(순조 1) 1월 10일,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첨정하게 된 대왕대비 정순 왕후 이름으로 오가작통(五家作統)의 법을 엄격히 실시하여 사교(邪敎)·사학(邪學)을 엄금·근절하도록 하라는 엄중한 지시가 내려졌다.

박해령이 내려지자 홍교만은 정약종(丁若鍾)의 천주교 관련 책, 성물,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을 담은 고리짝을 자신의 집에 숨겼다. 그런데 한 신자가 다른 곳으로 고리짝을 옮기는 중에 탄로 나고 말았다. 이에 홍교만은 아들과 함께 한양으로 피신하였다. 한동안 그 곳에 숨어 지내던 홍교만은 오랫동안 피신할 수 없음을 알고 아들과 함께 포천으로 돌아왔고, 얼마 뒤 3월 경 체포되어 한양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홍교만은 체포된 지 10여 일 만인 1801년 4월 8일 정약종·최필공·최창현·홍낙민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홍교만의 나이 63살이었다.

아버지 순교 소식을 전해들은 홍인은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따르겠다는 열의와 효성으로 모든 고난을 견뎌냈다. 홍인의 용기와 인내에 포졸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10개월 옥고를 치르는 동안 갖은 고통과 시련을 당하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홍인은 1802년 1월 30일 포천 관아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당시 44살이었다. 홍교만은 1925년 7월 시복식을 통해 다른 순교자 79위와 함께 복자(福者)로 추대되었다. 그 뒤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한 한국 순교 복자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의 품위로 올랐다.

신유박해 이후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 등 수차례에 걸친 사옥으로 초기 신자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그 후 다른 지방에서 박해를 피해 경기도 포천으로 옮겨온 신자들이 옹기를 구우며 삶을 영위해 나갔는데 이들을 위해 여러 공소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옹기를 빚었던 것은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산속에서 쉽게 흙을 구할 수 있었고 큰 기술이나 경비가 필요치 않았으며, 옹기 행상을 통해 교우 간에 연락을 주고받거나 전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소와 성당의 설립]

1900년대 초에 이르러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설운리 해룡 마을에 포천 지방 최초의 공소가 세워졌다. 이후 내촌[내촌면]·맑은데미[일동면송우리[소흘읍고일리[신북면오가리[창수면]·새묵이[신북면] 등지에 공소가 마련되었다고 한다. 해룡 공소는 포천읍 설운리에 위치했는데 대원군 박해 당시 개성 방면의 신자들이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신자가 17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큰 공소였으나, 6·25 전쟁으로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되고 신자 대부분이 도시로 떠나면서 규모가 작아졌다.

1961년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장베르뇌 주교가 대대로 사용하던 ‘제대 판목’을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기증하였다. 제대 판목은 평상시에는 선반으로 사용되었으나 미사성제를 집전할 때에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1972년 8월경 공소 건물이 신축되었지만 1982년 포천 성당 구역 조정 시 제15반에 편입되면서 완전 폐지되었다.

고일리 공소는 신북면 고일리에 있었는데 1900년대 초 남양주군 덕수면 근방 점촌에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1921년 당시 55명의 신자가 점촌을 이루고 신앙생활을 하였다.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주한 이후 6·25 전쟁으로 완전히 폐쇄되고 말았다. 오가리 공소는 1921년 신자가 67명에 달할 정도로 비교적 컸지만,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3·8선이 놓이면서 없어지고 말았다. 새묵이 공소는 포천군 신북면 금동리에 위치했는데, 6·25 전쟁 이후 대부분의 신자가 떠나면서 자연 소멸되고 말았다.

1915년 경기도 양평의 퇴촌 성당에 손성재(孫聖宰) 신부가 부임한 이후, 포천 지역은 손성재 신부의 사목 관할이 되었다. 손성재 신부는 1910년 한기근 신부와 더불어 4복음서 『사사 성경』을 처음으로 한글로 완역하였다. 1927년 5월 의정부의 신암리 본당에 최문식(崔文植) 신부가 부임하면서 포천을 비롯하여 연천·양주·파주·가평·고양 등지가 그의 관할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30년 4월 신암리 본당이 폐지되면서 포천은 잠시 개성 본당 관할 하에 두어졌다가 1931년부터 1935년까지 행주 본당, 1935년 이후에는 덕정리 본당[현 의정부2동 본당]의 관할로 바뀌었다.

포천 성당이 설립된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뒤였다. 1955년 당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6군단 군단장 이한림 장군의 역할이 컸다. 이한림은 포천의 유지로부터 기증받은 포천읍 신읍동의 3,300㎡[1000여 평]에 5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181.5㎡[55평] 규모의 석조 성당과 66㎡[20평]의 사제관을 지었다. 공사는 1955년 11월에 마무리되었다. 나무 마룻바닥에 인근 덕정리에서 날라온 화강암 벽체와 종탑을 세우고 함석지붕을 세운 준고딕식 조적조 성당이었다. 1955년 12월 10일 당시 춘천 대목구장이었던 구토마스 주교 주례로 봉헌했으며, 1956년 2월 21일 김진하 신부가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면서 포천 본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는 전쟁 직후였기 때문에 미국 가톨릭 복지 협의회 산하의 전쟁 구호 위원회를 통해 포천 지역의 신자와 군민에게 식량과 의복을 무상 지급했고 밀가루와 옥수수죽을 배급하여 배고픈 이들을 도왔다. 1971년 11월 포천읍 신읍리 대지 6,600㎡[2,000여 평]을 매입하여 자매회 수녀원을 건립하였고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을 위해 1973년 9월 모친 의원을 개원하였다. 1977년 2월 신자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포천 대건 신용 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1979년 11월 포천 본당에 복자 유치원을 설립하고 1980년 3월부터 운영하였다.

그런데 1990년 사업에 실패한 전직 경찰 출신이 성당 안 제의실에서 촛불을 켜놓고 잠을 자다가 불을 내는 바람에 벽체만 남긴 채 지붕이며 제대, 성물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불이 난 뒤 지역 신자들이 건물 붕괴를 우려해 성당을 헐어 새로 짓자고 했지만 문화재의 가치가 크다고 판단한 춘천 교구장 장익 주교와 포천 성당 신부, 학자들의 노력으로 2006년 9월 국가 등록 문화재[제271호] 목록에 올랐다. 군부대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석조 건물이 적지 않았는데 이 포천 성당은 군부대가 직접 세운 것 가운데 남아 있는 유일한 성당이다.

포천 성당은 여러 개의 공소를 관할했는데 1950년 6·25 전쟁으로 파괴되거나 옹기촌이 폐쇄되면서 자연 소멸되었다. 1957년 이후 철원군 일대, 1970년 이후 영북면[운천 공소] 일대, 1971년 이후 일동면[화대리 공소]·이동면·내촌면[내촌 공소] 일대의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1972년에는 신평 3리의 나환자촌에 새롭게 공소가 설립되었다.

1983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백의리 공소가 연천 성당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고 1991년 8월 송우리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면서 가산 공소와 함께 분할되었다. 현재 포천 성당신평 공소만을 관할하고 있다. 신평 공소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 3리에 자리하는데 1972년 6월 처음으로 영세자 5명과 가족들이 모여 공소 예절을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1974년 10월 첫 미사가 올려졌다. 1976년 4월부터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산 7번지에 터 닦기를 시작하여 1980년 8월 공소가 신축되었다.

백의리 공소는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에 위치했는데 6·25 전쟁 때 수복되면서 미 포병 1군단과 한국군 제20사단[현 5사단]이 주둔하면서 시작되었다. 1970년대 이후 미군 부대가 철수하면서 점차 신자수가 감소하였다. 1983년 2월 백의리가 연천군에 속하게 되면서 포천 성당에서 분리되어 연천 성당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

운천 성당은 1970년 11월 포천 본당 관할 하에 있던 운천 공소가 분리되면서 설립되었다. 운천 공소는 1938년경 강원도 양양군 순양면 섭준리에서 이주해 온 황욱 형제를 비롯한 7가구의 신자들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1945년 8월 해방 이후 3·8선으로 남북이 갈리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하였다. 1954년 11월 수복 지구 임시 자치법으로 행정권이 수복되면서 당시 주둔하고 있던 미군 부대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운천리 산 375-1번지에 임시로 공소 건물을 신축하였다. 1967년 12월 화재로 공소 건물이 전소된 뒤에 포천 본당 주임 윤병희 신부의 지원을 받아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운천리 345-7번지의 990㎡[300여 평] 부지에 132㎡[40여 평]의 공소 건물이 신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운천 성당 관할 하에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에 지포 공소가 있었는데, 1991년 8월 운천 본당에서 분리되어 지포 본당[현재 갈말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일동 본당은 1971년 11월 포천 성당의 관할이던 화대리 공소에서 시작되었다. 화대리 공소는 1921년 설치되어 덕정리 성당[현 의정부 성당]에 소속되었다가 1955년 4월 포천 본당 관할로 이관되었다. 1957년 대지 330㎡[100평]에 건물 면적 99㎡[30평]의 건물을 신축하여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로 옮겼고, 1970년 5월 3,300㎡[1000여 평]의 토지를 매입하여 성당을 건립한 후 1971년 11월 일동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이와 더불어 포천 본당 소속의 이동 공소, 내촌 공소, 맑은데미 공소 등이 일동 본당으로 이관되었다.

그 뒤 2006년 2월 내촌 공소는 솔모루 성당의 가산 공소와 더불어 성당으로 승격되었다. 이동 공소는 2010년 2월에 성당으로 승격되었다. 맑은데미 공소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신팔리에 위치했는데, 1882년 임오군란을 피해 서울에서 거주하던 파평 윤씨를 비롯한 3~4가구가 이주, 정착하면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대부분의 공소가 옹기촌을 형성했는데 이곳은 농사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솔모루 성당[송우리 성당]은 1925년 최문식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김경희 신자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송우리 공소에서 시작되었다. 송우리 공소는 포천군 최남단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가산면내촌면에 인접해 있고 남쪽으로 포천읍, 서쪽으로 양주군 주내면, 남쪽으로 의정부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1925년경 김경희 자매가 근처 ‘검둥 엄마’라 불리는 교인을 통해 입교하면서 천주교가 전파되었다.

이후 포천 성당이 설립되었고 1969년 12월 서울 교구에서 춘천 교구로 변경되었으며, 타 지역의 신자들이 유입되었다.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송우리에 1978년 165㎡[50여 평] 규모의 공소 건물을 신축한 뒤로 교세가 더욱 확장되었다. 그 뒤 1991년 8월 송우리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1998년 12월에 성당을 중창하였다. 2005년 1월에 성당 명칭을 이 지역의 옛 이름을 따 솔모루 성당으로 개칭하였다. 1960년경 설립된 가산 공소를 관할했으나, 가산 공소는 2006년 2월에 내촌 공소와 더불어 가산 성당으로 승격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1.01.05 내용수정 등록 문화재 → 국가 등록 문화재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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