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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월 1일 진주에서 창간되었던 월간지. 창간사에 ‘부(富)에 굴하지 아니하고, 세(勢) 위력에 동(動)하지 않고, 3군(軍)의 용(勇)에도 뺏기지 않으며 비록 요순에게 악이 있다면 악 그대로, 걸주(桀紂)에게 선이 있다면 선 그대로 추호의 편협 없이 공정하고 엄격히 판단하겠다’ 라는 굳건한 좌표를 명시하며 창건하였다. 8단의 타블로이드 4면이며, 본문 활자는 5호, 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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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9월 1일 진주에서 창간된 월간지. 최초의 지방신문인 『경남일보』가 폐간된 지 20여 년 만에 편집인 겸 발행인 신현수(申鉉壽), 인쇄인 강주수(姜周秀)에 의해 창간되었다. 매월 1일 8면씩 발행하였으나 1936년 1월1일자인 신년특집호가 10면 발행되었고, 지령 9호인 1936년 5월부터는 매월 1일에서 15일로 변경되어 발간되었다. 당시 구독료는 10전(錢)이고,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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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 정약용(丁若鏞)이 논개 사당인 의기사에 부쳐 쓴 글. 의기사는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논개의 사당으로, 1740년(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건립한 것이다. 1956년 의기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하였으며, 1983년 7월 20일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이 글은 1802년(순조 2) 다산 정약용이 지은 것이다. 의기사 기문의 원문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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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임경(林卿), 호는 원재(源齋)이다. 어릴 때부터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부모(父母)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더우면 베개머리에서 부채질하고, 추우면 더운 이불을 덮었으며, 밖에 나가서 고기나 과일을 얻으면 반드시 품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서 어버이에게 드리었다. 밤에는 책을 읽고 낮에는 땔감을 베었으며 항상 맛있는 음식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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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중선(仲善), 호는 동야(東野). 봉곡(鳳谷) 정대영(鄭大榮)의 증손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문장을 만들 때는 간결하고 예스러웠다. 김범갑(金范甲)의 무고를 받아 자제와 친구에게 단단히 타일러 이치에 의거하여 엄격하게 배척토록 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 때는 바른대로 지키고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종형과 더불어 우암(尤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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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치경(致敬), 호는 용헌(容軒).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후손이다. 천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컸으며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마음과 몸을 다하여 지극히 하였다. 그리고 향당(鄕黨)의 일에는 한결같이 공정하게 처리하니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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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회일(會一). 징질와(懲窒窩) 정유기(鄭有祺)의 증손이다. 일찍이 사마(司馬)에 올라 뛰어난 문장과 효우(孝友)로 이름이 나, 세 번이나 천거되었으나 임용되지 못하자 주위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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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전주최씨 최운개(崔云凱)의 딸로, 진주인 승사랑(承仕郞) 정승업(鄭承業)의 아내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칼을 차고 스스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만일 불행한 일을 만나게 되면 나는 반드시 이것으로 죽음을 결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를 넘겨 1593년에 왜적이 이웃 마을을 핍박하여 거의 모두 죽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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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효자. 자는 임중(任中), 호는 남계(南溪). 교도(敎導) 정관(鄭寬)의 아들이다. 1570년(선조 3)에 진사가 되었다. 평소 효성이 깊고 지극하여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 상례를 예로써 하고 깊은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도 상복을 벗지 아니하였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발을 밖에 내지 아니하고 죽을 마시며 슬퍼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탄복하였다. 악한 것을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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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중렬(仲烈). 집의를 지낸 정대영(鄭大榮)의 후예이다. 생몰년은 미상. 영조 재위(1725~1777) 전후로 활동하였다. 천성이 영특하고 학문을 열심히하였다. 형제와 더불어 당시의 대학자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을 찾아가니 김원행이 시를 지어 그들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였다. 학문이 매우 해박하여 하늘과 사람의 성명(性命)으로부터 하락팔괘(河洛八卦)와 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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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호는 매죽당(梅竹堂). 첨정을 지낸 삼계 정밀(鄭蜜)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 생원에 합격하였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臣), 창주(滄洲) 하증(河憎) 등을 따라 『진양지(晋陽誌)』를 편찬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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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자는 계인(系仁), 호는 용담(龍潭). 첨정을 지낸 삼계 정밀(鄭蜜)의 아우이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있어 1570년(명종 3)에 장원으로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고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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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진주 출신. 호는 우곡(偶谷). 정승을 지낸 정석(鄭碩)의 아들이다.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청맹(靑盲 : 겉은 멀쩡하나 실제는 눈이 안 보임)을 앓는다고 핑계대고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말년에는 진주 사봉면 사곡리에 우곡정(隅谷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가 여러 번 초빙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신하를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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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윤원(允元), 호는 모재(慕齋).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후손이다. 성품이 침중하였으며,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겼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학질을 앓았다. 새벽마다 어머니가 쾌차하시기를 빌었더니 홀연히 새매가 메추리를 떨어뜨렸다. 이를 세 번에 걸쳐 드리니 어머니의 병이 드디어 나았다. 나이 34세에 병사하자 그 아우 정낙균이 형의 죽음을 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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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하서(夏瑞). 호는 동호(桐湖) 또는 초객(樵客). 석정 정홍조(鄭弘祚)의 후손이다. 동곡(桐谷)에 살면서 학문과 문학에 힘썼다. 모든 일에 있어 유학을 지키는 일에 힘썼으며, 조선 중기 진주 지역의 대학자 하홍도(河弘度)[1593~1666]의 문집인 『겸재집(謙齋集)』 간행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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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자는 자의(子義), 호는 추담(秋潭).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다. 일찍부터 행실이 바르고 학식이 넉넉하였으며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태계(台溪) 하진(河溍)과 더불어 도의의 사귐을 가졌다. 그의 아들 정례도 또한 하홍도를 스승으로 섬겨 재예가 뛰어났으며 진사에 합격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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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수계(壽季), 호는 징질와(懲窒窩). 진사 정대영(鄭大榮)의 아들이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고 병의 간호에 10년 동안 한결같았다. 상을 당하여서는 슬픔으로 몸이 상할 지경이 되었다. 형제 네 사람이 함께 살면서 강학(講學)과 학문을 기쁜 마음으로 하였으며, 곧은 마음을 안고 스스로 편안히 지냈다. 독서차록(讀書箚錄)을 집안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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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길숙(吉叔).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손자이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아 문학과 행실이 뛰어나 사우의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니 겸재(謙齋)가 만사(輓詞)를 지어 슬퍼하였다. 후에 손자가 귀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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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호는 봉강(鳳岡).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손자다. 어릴 때부터 글을 지으니 할아버지 정문부가 매우 기특히 여기고 사랑하였다. 행실에 있어서 효제(孝悌)로써 근본을 삼고 학문을 함에 형제가 함께 살면서 밤낮으로 강론하고 연마하니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와 여러 학자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숙종 때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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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진주시의 지역문화사업과 향토문화 연구를 위해 설립된 단체. 진주의 향토사 연구와 전통문화의 계승·발전 및 각종 문화행사를 통한 진주지역문화의 진흥을 목표로 1949년 10월 1일에 설립되었다. 1949년 10월 1일에 USIS 진주지원으로 발족하여 박세제를 초대원장으로 하였다. 1950년 10월 10일에 진주미국공보원으로 개칭되었다가 1957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