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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노수신(盧守愼)[1515~1590]이 전라남도 진도군에서의 유배 생활에 관한 심사를 읊은 글.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은 노수신이 진도에 유배와서 자기의 심사를 이천자(二千字)로 적어 놓은 글로 노수신 선생의 문집에 실려 있다. 내가 귀양살이 온지도 어언 반년이 되었구나. 온 포구는 왜적들이 발동하여 피에 젖었고 석가래 사이에 시(詩) 몇 편 걸려 있어 읊으려니 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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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정만조가 진도 유배생활 중 쓴 시문을 모은 책. 무정 정만조(鄭萬朝)[1858~1936]는 1896년 진도에 유배와서 12년간 지냈다. 이 기간 동안 정만조는 『은파유필(恩波濡筆)』을 집필하였다. 『무정시고』는 정만조에게 사사받은 진도의 한 유생이 정만조의 시문만을 모아 필기해 둔 필사본이다. 모두 45쪽으로 되어 있다. 앞쪽에 ‘무정시고(茂亭詩稿)’라 쓰여 있고 ‘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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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선무원종공신들에게 발급한 증서. 선무원종공신록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7년에 걸친 임진왜란 중 나라에 공헌한 자를 선조(宣祖)가 도승지 신흠(申欽)을 시켜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발급했으며 3등까지의 명단과 신분이 기록되어 있다. 1604년 선정의 선무공신(宣武功臣)이 1,2,3등 전체 18명에 불과해, 이듬해 재정리하여 공헌자 9,060명을 녹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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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화가 소치 허련이 쓴 글을 모은 책. 화가 허련(許鍊)[1809~1893]의 자필 기록인 『운림잡저(雲林雜著)』·『운림수록(雲林隨錄)』·『운림묵록(雲林墨錄)』 등의 여러 기록을 모아 만든 책이다. 1843년 이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운림산방에 기거하면서 썼다. 『소치실록』에는 진도의 풍광과 함께 여러 인물들과 교류한 내용이 들어있다. 허련은 당대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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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유와(牖窩) 김이익(金履翼)이 저술한 예의범절 지침서. 『순칭록(循稱錄)』은 1800년에 전라남도 진도에 유배되어 적거하던 김이익이 문하생 후옥(厚玉) 박진종(朴震琮)[1758~1834]의 요청으로 간행한 책이다.『순칭록』은 진도의 낙후된 예의범절의 지침서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간행되었다. 그 후 진도지역의 문장가인 강재(康齋) 박진원(朴晋原)[1860~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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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진도의 풍속에 대해 쓴 책.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는 궁내부참의관 시절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이에 관계되었다는 혐의로 1896년 진도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되어 1907년까지 12년간 진도에서 생활하였다. 이 기간 동안 정만조는 진도에서의 생활을 기록하였다. 일기체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는 진도의 독특한 풍속들이 기록되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강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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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영국인 바실 홀이 쓴 조선 견문기. 영국 정부는 청나라와의 무역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암 허스트 사절단을 수행한 파이어호 함장 바실 홀(Basil hall) 대령은 주함 알세스트호를 이끈 머리 맥스웰(Murray Maxwell) 함장과 함께 1816년 2월 19일 영국을 출항하여 7월 27일 목적지인 천진 항에 도착하였다. 천진에서 북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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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진도군 향청(鄕廳)의 업무를 기록한 자료. 1796년(정조 20)부터 1808년(순조 8)까지 12년간 진도군 향청이 처리한 업무에 대한 자료이다. 진도군 군내면 김진용(金珍龍)이 소장 중인 것을 1992년 진도문화원이 『진도향토사자료』제1집 영인본으로 간행했다. 조선 후기 향청은 향임(鄕任)과 향리(鄕吏)의 이원화된 군 행정기구의 하나였다. 이런 특징을 가진 향청이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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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가계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가계리는 금계리의 행정리로 고군면 면소재지의 남동쪽에 위치한다. 고인돌은 가계마을로부터 북쪽으로 150m 정도 떨어진 지점의 지방도 801호선 도로 양쪽에 위치하고 있다. 10여기 이상의 고인돌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수풀로 인하여 정확한 형태나 규모 등은 파악되지 않았다. 가계 고인돌군은 10기 이상이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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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가치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 진도군 지산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801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가치리에 이른다. 가치리 유물산포지는 마을의 서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큰 산(278m)의 동쪽 사면부에 있다. 2003년에 전남문화재연구원에서 농로 확장·포장공사와 관련하여 일부지역을 시굴하였다. 조사결과 유구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조사구역이 극히 일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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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진도로 유배된 문신. 본관은 금천. 김장생의 제자이며 우의정을 역임한 강석기(姜碩期)[1580~1643]의 둘째 아들이다. 강석기의 딸은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인 강빈이다. 소현세자가 인조에 의해 독살된 뒤 강빈은 저주사건(역모)의 주모자로 모함되어 사사되었다. 이를 ‘강빈의 옥’이라 한다. 앞서 죽은 강석기는 관작을 추탈당하였고, 그의 부인은 처형되었다. 1645년(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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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현지(顯之), 호는 신안(新安), 시호는 혜평(惠平). 경상남도 산청 출신으로 강흥국(姜興國)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강행(姜行)이고, 아버지는 강문회(姜文會)이며, 어머니는 김윤(金允)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1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간사(奸邪)를 논핵하는 대간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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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승려. 계월선사는 고려시대 1129년(인종 7)에 쌍계사를 중수하였다. 그 외 다른 행적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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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이순신이 고금도에서 왜군을 크게 격파한 해전. 고금도해전은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 2월부터 이순신은 고금도에 내려와 진을 치고 있었는데, 8월 왜군이 고금도로 침입해 들어오자, 이순신이 직접 조선 수군을 이끌고 적중으로 돌격해 대파한 해전이다. 1598년(선조 31) 2월 17일 충무공 이순신이 수군 8,000여 명을 거느리고 고하도(현 목포시 충무동)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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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고방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석교중학교에서 고방리 방향으로 400m쯤 가다 우측 산길로 접어들어 300m 정도 가면 6기의 고인돌이 군집해 있었다. 또한 석교중학교 정문 앞 50m 지점 농로 옆에도 1기의 고인돌이 있었다. 이곳에 있었던 고인돌은 농지정리 과정에서 모두 유실되어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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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특정 시기에 유행한 무덤양식의 총칭. 넓은 의미에서 고분이란 과거 사회에서 죽은 이를 위해 수행한 매장의례 행위가 물질적인 증거로 남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시대나 지역에 따라 고분의 형태가 다르게 나타난다. 고분의 명칭은 몰무덤(말무덤), 똥뫼, 조산(造山), 장고분 등으로 불리고, 고분의 피장자의 신분이나 규모에 따라 묘(墓), 분(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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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고성리 64번지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성곽. 고군면 고성리 고군성지 주변의 지형을 보면, 남쪽은 첨찰산, 죽찰산 등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는 진도 용장성이 있다. 동쪽과 서쪽에는 좁다란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동쪽에는 해남 쪽으로 돌출한 원포리를 중심으로 내만된 해안이 형성되어 있는데, 현재 원포리와 내산리 사이에는 방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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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고성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고성리 고인돌군은 두 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으며, 가군에 7기, 나군에 11기 등 모두 18기의 고인돌이 있다. 가군 고인돌은 고성중학교에서 남서 방향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6기가 1열을 이루고 있고, 고성중학교 담과 논 사이에 아래쪽 부분이 묻혀 있는 1기의 고인돌이 있다. 나군 고인돌은 고성리와 오성리 두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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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고야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고야리 고인돌군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진도군 지산면 고야리에서 인지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 약 600m 정도 가면 야산 구릉에 4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곳에서 인지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3기의 고인돌이 있으나, 받침돌은 보이지 않고 잡초로 덮여 있다. 1979년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에서 처음으로 조사하였으며, 이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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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고야리 새터마을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고야리에서 약 250m쯤 인지리 쪽으로 가다보면 남동쪽으로 밭과 논가에 3기의 고인돌이 위치한다.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 시 새로이 발견된 유적이다. 기존조사내용에 따르면 3기의 고인돌 가운데 1기는 받침돌 1개가 받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경작으로 인해 모두 유실되어 확인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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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현풍(玄風). 진도 출신이다. 아버지는 곽민제(郭岷薺)이고 어머니는 이(李)씨로, 곽천중이 벼슬에 오른 뒤 1714년에 각각 자헌대부 공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총관과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1707년(숙종 33) 무과 중시병과에 합격하여 군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원종공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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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관마리 관마마을에 있는 삼국시대의 고분군. 진도군 지산면 관마마을에서 오류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 600m 정도 가다보면 길 우측으로 작은 소로가 있다. 이 길을 따라 100m 정도 가면 길 좌측으로 관마 고분군①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은 관마마을의 배후산인 큰부엉산[188m]의 남동쪽 사면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현재 광산이씨 세장산(光山李氏 世葬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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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관마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관마 고인돌군은 3개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가군 9기, 나군 2기, 다군 8기 등 19기의 고인돌로 이루어져 있다. 관마 고인돌군 가운데 가군 고인돌의 위치는 관마리 전면 약 200m 지점이다. 설남신씨 밭 가운데 9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주위는 낮은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작은 분지를 이룬다. 이곳에서 약 5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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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관마리 관마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청터. 관마청은 진도군 지산면 관마마을에서 독치마을로 가는 소로를 따라 가다보면 관마마을 동쪽 끝에 위치한다. 이곳은 큰부엉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리는 지맥의 말단부로, 유적 앞으로는 소하천이 흐르고 있다. 관마청은 조선시대 목장업무를 담당하던 종6품급 관직이었던 감목관이 배치되었던 곳이다. 6방 관속, 관노, 통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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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관마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에서 삼국시대에 걸친 유물산포지. 관마리 유물산포지는 2개 지역에서 확인되었다. 관마리 유물산포지 가 지역은 관마리 마을 앞 약 200m 지점 밭에 있다. 주위는 낮은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작은 분지를 이루고 있다.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이곳 지석묘군으로부터 북동방향 약 2㎞ 정도에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며 현재는 간척으로 벼농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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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관매도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산포지. 진도군 조도면 관매도 선착장에서 관매해수욕장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가면 속칭 ‘장산편’마을에 이르게 된다. 유물산포지는 이 마을의 남동쪽 끝부분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해발 110m의 야산에 서쪽으로 뻗어내린 사면의 말단부에 해당한다. 관매도리 유물산포지는 유적은 김광호(목포시 산정동)씨의 제보로 조사되었다. 이곳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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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관사도리에 있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산포지. 조도면 관사도리 유물산포지는 진도군 조도면 관사도리 뒤편 밭에 위치한다. 이곳은 해발 173m의 야산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오면서 형성한 비탈면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현재 이 유물산포지는 계단식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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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원이 공무를 볼 수 있게 지은 다양한 종류의 건물. 관아는 크게 중앙관아와 지방관아로 나눌 수 있으며, 형성 시기는 건축지(建築址)와 출토유물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인 관아 건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방관아는 읍성 내에서 주로 북쪽에 위치하며, 그 중심에는 동헌과 객사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방관제로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府), 대도호부(大都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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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관작리에 있는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 관작리 유물산포지는 진도군 조도면 관사리의 행정리인 관작리 남동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산사면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마을까지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청동기에서 삼국시대에 제작된 회청색경질토기편과 석재편 등이 수습되었다. 한편 기존조사 내용에 따르면 돌도끼 두 점이 출토되었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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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관호리에 있는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유물산포지. 진도군 조도면 관매도리의 행정리인 관호리 마을 남서쪽의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수습된 유물은 회청색경질토기편, 갈돌 등이 있다. 현재 계단식 밭으로 경작되고 있고, 사면의 말단부에는 민가 건축으로 인해 절개면이 드러나 있다. 이 절개면에서는 토양쐐기가 관찰되었으나, 주변에서 구석기유물은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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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광전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광전 고인돌군은 두 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가군에 6기, 나군에 12기 등 모두 18기의 고인돌이 있다. 가군 고인돌은 삼막리에서 염태리로 가는 도로변의 광전리 입구 민묘 주위에 있고, 나군 고인돌은 삼막산 서쪽 사면과 이욱태씨 소유의 밭에 흩어져 있다.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때 새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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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교동 고인돌군은 두 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다. 가군 고인돌은 진도읍 교동리 제재소 옆에 5기가 있고, 나군 고인돌은 향교 주위에 12기가 위치하고 있다. 1968년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에서 남해안 도서 지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를 학계에 보고함으로써 처음 알려진 유적이다. 그 후 1987년 목포대학교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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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부터 1794년까지 진도군수를 지낸 조선후기 무신. 정조 연간에 장연현감,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 선전관, 진도군수, 금위영 낭청을 역임하였다. 순조 연간에는 공청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다산 정약용과 교유하였다. 구강은 제223대 진도군수인데, 진도군수로 있던 1793년(정조 17)에 흉년이 심하게 들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라도 전역에 번(番)의 정지, 대동(大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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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구분실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석교리에서 봉상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왼쪽 120m 지점에 고인돌이 있다. 이곳은 여귀산에서 봉상리 쪽으로 길게 이어져 내려온 지맥의 서쪽 경사면에 해당하는 곳으로 ‘배나무골들’이라 불린다. 고인돌은 봉상리에 거주하는 이병익씨 소유 밭에 5기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중 규모가 가장 큰 고인돌은 덮개돌의 크기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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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조선중기 선조 대부터 효종 대까지 활약한 무신으로, 1437년(세종 19) 진도 설군 이후 제105대 진도군수로 1621~1623년까지 재임하였다.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중재(仲載), 호는 유포(柳浦). 증조는 능성군(綾城君) 구순(具淳), 할아버지는 좌찬성 구사맹(구思孟), 아버지는 대사성 구성(具宬)으로 인조의 외종형이다. 어머니는 별좌 정억령(鄭億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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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귀성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 상만리에서 도로를 따라 국립남도국악원 쪽으로 따라가다 보면 귀성리에 진입하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귀성리 쪽으로 가다 보면 내리막길에 ‘팬래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 유적은 팬래골 일대에 위치한다. 삼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평행침선문과 물결무늬 등이 시문된 회청색경질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이곳은 여귀산의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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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금골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진도대교를 지나 국도 18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군내면 둔전리의 행정리인 금골리에 이르게 된다. 고인돌은 금골리 뒤편에 자리한 군내중학교 소로를 따라 북동쪽으로 100m 정도 가다 보면 고갯마루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고인돌의 규모는 490×400×60㎝이며, 받침돌이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다. 덮개돌의 평면형태는 장타원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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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에 왜구의 침략을 피해 전라남도 진도지역 주민이 해남 금산(金山)으로 이주한 사건. 여말선초 왜구가 창궐했을 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진도 또한 끊임없는 왜구의 침입을 받았다. 이에 진도군민의 생존대책의 자구책을 찾고 후일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1350년경 진도군민 전체가 해남 금산으로 이사하면서 군치소도 함께 옮겼다가, 1437년 진도로 다시 돌아온 사건이다. 고려 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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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 금호도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관해정의 건립 경위는 관해사 내에 있는 비석을 통해 알 수 있다. 관해정을 세운 사람은 정민익(丁民翼)[1781~1861]으로, 호는 묵재(黙齋)이다. 정민익은 금명 율동서원에서 공부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금호도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크게 감격하여 보답을 하려 하였으나 극구 사양하자, 보답하고자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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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금호리 금호도에 있는 유물산포지. 회동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남서쪽으로 5분 정도 가면 금호도에 이르게 된다. 유물산포지는 모두 두 곳이다. 금호선착장에서 북쪽으로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구릉사면부에 위치하는 유물산포지1은 해발고도 38.3m의 구릉에서 남서쪽으로 흘러내린 20.5~27m 정도의 말단부에 해당한다. 금호도 선착장에서 오산초등학교 금호도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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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연대산에 있는 연대지(烟台址).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송정리에서 죽림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접도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300m 정도 가다보면 도로 우측에 금갑리 연대지 안내판이 보인다. 기존 조사에서는 사구미 연대지로 보고되었다가 행정명에 따라 금갑리 연대지로 정정되었다. 횃불이나 연기를 피워 중앙으로 소식을 전달했던 연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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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진도 출신의 무신 본관은 김해. 자는 군보(君寶)이고 호는 남정(南亭)이다. 김해김씨 경파로 진도 입도조 12세손이다. 아버지는 김구성(金九成)이다. 1699년 진도군 임회면 송정에서 김구성(金九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735년 무과에 급제해 수문장을 시작으로 훈련주부, 판관, 우후를 역임하였다. 1756년에 , 1765년에 웅천현감, 김해진관 병마절제사를 지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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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1437년(세종 19) 진도 설군 이래 제90대 진도군수로 1593~1594년까지 재임하였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덕로(德老). 아버지는 훈련원판관 김대유(金大有)이며, 어머니는 감찰 오세훈(吳世勳)의 딸이다. 아들은 김광협이다. 아우로는 김천수(金千壽)·김백수(金百壽)·김구수(金九壽)가 있다. 1553년(명종 8)에 태어나 15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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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도강(道康). 자는 문계(文啓), 호는 삼호재(三乎齋). 아버지는 진도 입향조 김경의(金敬義)의 8세손 김봉명(金鳳鳴)이다. 부인은 오이태(吳以泰)의 딸이며, 4남 5녀를 두었다. 1694년(숙종 19)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향동리에서 태어났으며, 외가인 고군면 고성에서 성장하였고, 1775년(영조 31)에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외가인 고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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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무장(武將)·정치가. 김방경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서 대몽항쟁의 주력인 삼별초(三別抄)를 진압했고, 원의 일본 정벌 때 고려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본연(本然).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병부상서·한림학사를 지낸 김효인(金孝印)이다. 김방경은 첫 부인으로 박익정(朴益旌)의 딸을 맞이하였다. 기거랑지제고중서사인을 지낸 박익정은 무인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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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 초명은 익천(益千), 김해김씨 경파(京派) 입향조 김가우(金嘉佑)의 손자다. 아버지는 김중연(金仲淵)이고 어머니는 원주이씨이다. 부인은 진주강씨 강태망(姜泰望)의 딸이며,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4형제를 두었다. 1437년 진도가 해진군에서 분리되어 군으로 설치될 때 아버지 김중연과 함께 읍성 건설과 향교 건축에 공헌했다. 묘소는 전라남도 진도군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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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만호(萬戶)란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 제도를 본 딴 무관직으로 조선시대에도 사용되었다. 조선초기에는 만호는 3품관이었으나 성종 때 이르러 종4품관으로 2품계가 떨어졌다. 고려말 왜구의 분탕질을 피해 진도 군민들은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을 거쳐 해남군 삼산면에 옮겨와 살고 있었다. 진도의 군민들은 내지에 옮겨가 있었지만, 군사적인 면에서는 진도가 중요했으므로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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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신임사화로 진도에 유배된 광산김씨 인물. 조선후기 광산김씨 집안은 격화되는 노론·소론 당쟁의 중심부에 있었다. 김춘택(金春澤)[1670~1717]은 노론으로 광산김씨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인경왕후(仁敬王后)[1661~1680]의 아버지이자 숙종의 장인이었던 김만기(金萬基)였고, 숙부는 당대 문장가로 유명한 김만중(金萬重)이었다. 장희빈의 소생이 원자로 책봉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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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 자는 집성(集成). 1569년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부친 김견과 모친 창녕조씨 사이에서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 형제 중 둘째인 김환(金環)의 양자로 입적됐다. 진도 창읍 때 공을 세운 김석곤(金碩崑)의 현손이며, 명량대첩에서 순절한 조응량(曺應亮)이 사촌 처남이기도 하다. 부인은 남양이씨 이귀영(李貴榮)의 딸로, 2남 3녀를 두었다.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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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제59대 진도군수로 부임하여 1553년(명종 8)부터 1554년(명종 9)까지 재임하였다. 아들은 김호(金琥)이고, 증손은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한 김종수(金宗洙)이다. 진도군수로 있던 1554년(명종 9) 6월에 흑산도에서 왜인을 잡아 참하고 그 배를 나포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상을 받았다. 1555년(명종 10) 5월 군관으로 있다가 왜구의 침입이 심한 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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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후찬(厚贊). 진도군 진도읍 매향동에서 2남 중 큰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택군수를 지낸 김인경(金仁慶)이고 어머니는 은진송씨이다. 김수생은 전주이씨와의 사이에 아들 김름(金澟)을 두었다. 김름은 음직으로 삼화부사(三和府使)를 지냈다. 그 후손들은 해남으로 옮겼기 때문에 진도에는 후손들이 없다. 김수생은 종6품인 훈련원 주부를 지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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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증조부는 김극효(金克孝)이고, 조부는 김상헌(金尙憲)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광찬(金光燦)이다. 어머니는 목사 김사(金瀉)의 딸이다. 형은 김수흥(金壽興)이고, 아들은 김창집(金昌集)·김창협(金昌協)이며, 손자는 김제겸(金濟謙)이다. 1629년(인조 7)에 태어났다. 16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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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보숙(輔叔), 호는 유와(牖窩). 증조부 김창업(金昌業)은 진도에 유배와서 사사당한 김수항(金壽恒)의 넷째 아들이고, 할아버지는 김우겸(金祐謙)이다. 아버지는 김유행(金由行)이며 어머니는 이덕영(李德英)의 딸이다. 형제는 형으로 김이흥(金履興)·김이인(金履寅)이 있고, 서제로 김이진(金履眞)이 있다. 자식으로는 김철순(金徹淳)·김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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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무숙(茂叔), 호는 광남(光南). 할아버지는 김장생(金長生)이고,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김반(金槃)이며, 어머니는 첨추(僉樞) 김진려(金進礪)의 딸이다. 김익훈은 1619년(광해군 11)에 태어났다. 음직으로 등용되어 의금부도사·남원부사·사복시첨정 등을 지냈다. 조카인 김만기(金萬基)의 딸이 숙종의 비로, 숙종이 즉위한 뒤 군권의 요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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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 1736년(영조 12)~1739년(영조 15)의 3여 년간 제184대 진도군수로 재임하였다. 본관은 안동. 할아버지는 김광국(金光國)이다. 아버지는 이인좌의 난 진압의 2등 공신 언성군(彦城君) 김중만(金重萬)이다. 진도군수로 재임 중인 1738년(영조 14)에 전라도 남부 지방의 수령 등과 연명하여 흉년이 들어 심각한 상황임을 전하고 사창(社倉)에서 백성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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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도(凊道). 초명은 중룡(仲龍). 고려시대 시중(侍中)을 역임한 김여흥(金餘興)의 셋째 아들로 청도김씨의 시조이다. 선계(先系)는 김알지(金閼智)라 기록되어 있고,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悅)의 7세손이다. 1190년(명종 20)에 경상북도 청도군 하남면 대성리(大城里)에서 태어났다. 1218년(고종 5) 문과에 장원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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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경어(景魚). 아버지는 성균진사 김흠(金欽), 할아버지는 김승석(金承碩), 증조부는 김결(金潔)이다. 동생은 김효재(金孝哉), 김현재(金賢哉), 김덕재(金德哉), 김강재(金强哉) 등이다. 아들은 김백함(金白緘)이고, 사위는 황보신(皇甫信)이다. 1554년(명종 9)에 태어났다. 1573년(선조 6) 생원시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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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무신. 강화도에서는 김통정이 강화 교동면 출신으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 김통정에 관해서는 구전설화가 여럿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탄생설화로는 과부 어머니가 지렁이와 희롱하여 태어났다고 하여 원래 성은 지렁이 ‘진’씨였으나 나중에 김씨로 고쳐 김통정이 되었다고 한다. 김통정은 배중손(裵仲孫) 등과 함께 개경 환도를 반대하여 삼별초를 거느리고 대몽항전을 하였다. 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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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신임사화로 진도에 유배된 광산김씨 인물. 조선 후기 광산김씨 집안은 격화되는 노론·소론의 당쟁의 중심부에 있었다. 김춘택(金春澤)[1670~1717]은 노론으로 광산김씨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인경왕후(仁敬王后)[1661~1680]의 아버지이자 숙종의 장인이었던 김만기(金萬基)였고, 숙부는 당대 문장가로 유명한 김만중(金萬重)이었다. 장희빈의 소생이 원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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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김해. 자는 이종, 호는 호성(護聖). 1525년 진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인국(金寅國)이며 어머니는 조하국(曺夏國)의 딸이다. 아들은 김천익(金天益)이다. 진도에서 향교(鄕校)의 임원인 재임(齋任)으로 있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향교의 위패 보존이 위기에 처하자 동생 김홍남(金弘南)과 함께 대성전의 5성 10철의 위패를 북산의 바위구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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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설치한 조선 전기의 수군진. 전라수영(全羅水營)은 영산강 하류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왜구를 방어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1423년(세종 14) 전라수영을 목포(木浦)로 옮겼다. 그리고 목포의 병선은 황원(黃原)의 남면 주량(周梁)[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으로, 수영의 병선 3,4척을 매달 윤번으로 진도의 서쪽 소가포(所可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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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임회면 남동리에서 백동리로 넘어가는 동령재 좌우 논밭에 3기가 흩어져 있다. 남동리 고인돌군은 1968년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에서 남해안 도서 지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를 학계에 보고함으로써 처음 알려졌다. 그 후 1979년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와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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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 남동리에서 동령개로 넘어가는 약 1㎞ 지점, 도로 좌측에 1기의 선돌이 있다. 1979년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에서 실시한 지표조사 시에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그 후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재조사하였다. 현재의 상태는 밑부분이 지표에 묻혀 있어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으나, 현 높이는 90㎝, 최대 폭은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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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남산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남산리에서 죽엽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 200m 정도 가면 나타나는 왼쪽 밭 위에 3기의 고인돌이 동서 1열로 군집을 이루어 위치하고 있다. 고인돌군 동북쪽에 분지형의 소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남산리 고인돌군은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때 새로 발견된 유적이다. 고인돌 3기 중 2기가 받침돌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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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중휘(仲輝), 호는 의졸(宜拙). 좌의정 남지(南智)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남아(南啞)이고, 증조부는 남언순(南彦純), 아버지는 평강현감 남리(南裡)이다. 어머니는 서주(徐澍)의 딸이다. 아들은 남세하(南世夏)·남상하(南相夏)·남수하(南壽夏)·남성하(南聖夏)·남서하(南瑞夏)·남경하(南敬夏)·남덕하(南德夏)가 있다. 사위는 민진장(閔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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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1734년(영조 10)~1735년(영조 11)까지 제181대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진(元鎭)·관보(觀甫), 호는 담정(澹亭)·학야(鶴野). 증조부는 남선이고, 할아버지는 도승지 남치훈(南致熏)이고, 아버지는 공조좌랑 남필명(南弼明)이다. 어머니는 한성판윤 신후재(申厚載)의 딸이다. 아들은 남현로(南玄老)·남경로(南庚老)·남인로(南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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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 1701년(숙종 27)~1702년(숙종 28)까지 제157대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 1693년(숙종 19) 훈련첨정(訓鍊僉正)이었다가 이듬해에 도총경력(都摠經歷)이 되었다. 진도군수로 재임 중인 1702년(숙종 28) 4월에 주화 위조죄로 진도에 정배된 한도장(韓道長)이 유배지인 진도를 떠나 서울 집에 가서 행패를 부리게끔 방치하였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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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내동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오산리에서 내동리로 통하는 도로 왼쪽의 밭에 7기의 고인돌이 흩어져 위치하고 있는데, 동남쪽으로는 하조마을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오산리가 보인다. 내동리 고인돌군은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때 새로 발견된 유적이다. 대부분의 고인돌이 지표하에 묻혀 있어 자세한 조사는 할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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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내산리 내동마을에 있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유물산포지. 내동마을은 고군면 소재지의 동쪽에 위치한다. 유물산포지1은 내동마을에서 남서쪽으로 300m 정도 떨어져 있는 구릉상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유물산포지2는 내동마을에서 남서쪽으로 600m 정도 떨어져 있는 야트막한 구릉상에 자리하고 있다. 대부분 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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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삼당리 내삼당마을에 있는 삼국시대의 고분.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서 내삼당마을로 가다보면 길 우측으로 ‘땅굴들’이라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내삼당 고분은 논 가운데에 소나무로 둘러싸인 민묘 주위에 내삼당 고인돌군①과 함께 위치한다. 내삼당 고분의 평면형태는 원형이고, 직경은 3.5m 정도이며 높이는 1m 내외이다. 고분의 정상부가 일부 함몰되어 있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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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내삼당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내삼당리 고인돌군은 2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가군 15기, 나군 1기 등 16기가 조사되었다. 인지리에서 내삼당리로 가다보면 길 우측으로 ‘땅굴들’이라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가군 고인돌은 논 한가운데에 소나무로 둘러싸인 민묘 주위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2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으나, 모두 이동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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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 노숭(盧嵩)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노경장(盧敬長)이고, 할아버지는 노후(盧珝)이고,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노홍(盧鴻)이다. 1531년 성리학자로 명망 높은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혼인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다. 노준명(盧峻命)의 증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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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무신. 1270년(원종 11) 원종이 몽고와의 화평 교섭에 의하여 출륙환도(出陸還都)를 결정하고 삼별초의 명단을 압수하였다. 이때 노영희는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로서 배중손과 함께 궐기하였다. 이들은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반몽고, 반개경정부 입장을 명확히 하면서, 보다 효과적인 항전을 위하여 근거지를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겼다. 진도에 근거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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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망금마을에 있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산포지. 진도대교를 지나 진도각휴게소에서 송산리 방향으로 가는 해안도로를 따라 1.5㎞ 정도 가다 보면 무궁화공원이 나온다. 유적은 공원의 서쪽 구릉 일대에 산재해 있다. 이 유물산포지는 망금산[114.1m]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온 구릉의 말단부에 해당되며, 유적의 남쪽은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해안선과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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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분토리의 통일신라시대 이름. 뇌산군(牢山郡)은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분토리의 통일신라시대 지방행정구역의 한 군명이다 통일신라 때인 757년(경덕왕 16) 도산현은 뇌산군으로 승격되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도산현(徒山縣)[또는 추산현·원산현]으로 고쳐 대방주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뇌산군은 무주(武州)[지금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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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루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식의 집. 누정은 누각과 정자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 누각(樓閣)은 성문 위에 지은 집이나 전망이 좋은 곳에 2층 형으로 지은 전망대를 이른다. 정자(亭子)는 휴게를 위해 지은 집이다. 누정 중에는 숙소인 원(院)의 기능을 겸하는 경우도 있다. 진도지역의 경우 1923년에 나온 『중증진도읍지』에 보면 11개의 누정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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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년(명종 10) 왜구들이 배 70여 척으로 강진·진도 등 전라남도 연안지방을 습격한 사건. 을묘왜변(달량포왜변)은 삼포왜란(三浦倭亂) 이래 조선 정부의 세견선(歲遣船) 감축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왜인들이 1555년 5월 11일 달량포(達梁浦)[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와 이포(梨浦) 등을 침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 조정은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元積) 등을 출전시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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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맹성리 당도마을에 있는 고려시대의 유물산포지. 진도군 조도면 하조도에서 상조도로 가는 조도대교를 건너면 맹성리 당도마을에 이른다. 유적은 당도마을을 감싸고 있는 야산(119m)의 남쪽 사면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마을까지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청자편과 기와편 등이 확인되었다.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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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대마도리 돈대봉에 있는 조선시대 돈대 터. 진도군 조도면 대마도리 돈대지는 조도면 대마도의 서쪽 끝에 자리 잡은 돈대산[179m]에 위치한다. 1872년에 제작된『남도진여진지』와 주민들의 전언으로 돈대의 존재가 확인된다. 현재는 모두 유실되어 정확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고, 주변에 석재들만 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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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지역에 있던 통일신라시대 때의 고을 이름. 본래 도산현은 백제 때 원산현(猿山縣)이라고 했으나 당나라가 백제를 멸하자 나주 다시면(多侍面)에 대방주(帶方州)를 개설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통치하면서 도산현(徒山縣)으로 명칭을 바꾸고 서남해안의 방위에 임했다고 한다. 671년 김유신 등 신라군이 이들 당나라 군사들을 몰아내고 추산현(抽山縣)으로 개칭했다. 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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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산으로 둘러싸인 중앙부 구릉상에 평야와 인접하여 돈지리가 위치하고 있는데, 면사무소 뒤뜰에 2기의 고인돌이 위치하고 있다.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때 발견되어 조사되었다. 진도군에 있는 고인돌군 중 훼손이 심한 편이다. 돈지 고인돌군의 1기는 파괴되어 원형을 알 수 없고, 1기는 원형을 유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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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반봉건·반침략의 기치 아래 일어난 농민들의 사회개혁운동.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로, ‘보국안민 광제창생(輔國安民 廣濟蒼生)’을 기초로 천주교인 서학에 대칭되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동학농민군이 궤멸되고 1905년 교도 손병희(孫秉熙)는 교명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꿨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에 일어난 반제·반봉건·근대화운동으로 농민전쟁, 동학란,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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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에 유배되었던 여진족 추장. 조선 전기 사군육진 개척 후에도 북방의 여진족들의 동태는 불안정했다. 여진족은 조선에 귀화하거나 아니면 변방을 침입하여 생활 물자를 약탈해갔다. 이 시기에 조선에 귀화한 여진족 추장 망합은 여진족 토벌에 공을 많이 세웠지만 동시에 여진족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도 받고 있었다. 결국 망합은 진도로 유배되게 되는데 진도에서 7여 년 남짓한 유배생활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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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에 있던 백제시대 때의 고을 이름. 백제 때 매(買)는 물을 뜻하였으며 구리는 골을 뜻하였다. 그래서 매구리는 물골이란 뜻이 된다. 소포방조제가 축조되기 전 바닷물이 매구리현 깊숙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추측된다. 매구리현은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 첨탐현으로 개칭되어 뇌산군(牢山郡)[지금의 군내면 분토리]의 관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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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선조 30) 9월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명량해협(울돌목)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 1597년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해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하옥되었고, 원균(元均)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왜의 수군과 싸웠으나 다대포(多大浦)와 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였다. 사태가 긴급해지자 조정은 그해 7월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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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향동리 모사마을에 있는 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 고군면 소재지에서 지방도 801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모사마을에 이르게 된다. 모사마을 입구의 버스정류장에서 오른편 밭이 모사 유물산포지이다. 기존의 조사에서 회청색경질토편과 아가리편[구연부편]이 확인되었다. 현재 이곳은 ‘안논들’로 불리며 해발고도 25m 미만의 저평한 평지로 밭농사가 경작되고 있다. 유물산포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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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1739년(영조 15)~1740년(영조 16)까지 제186대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 본관은 여흥(驪興). 초명은 민기(閔圻), 자는 국보(國輔)·군보(君輔). 아버지는 병마절제도위 민진환(閔震煥)이고, 할아버지는 민정백(閔挺栢), 증조부는 민위(閔湋)이다. 아들은 1738년(영조 14)에 문과급제한 민사홍(閔師弘)과 민사의(閔師毅)이다. 형은 민해(閔垓)·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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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1797년(순조 7)에 도총도사(都總都事)를 역임하였고, 이듬해에 낭청(郞廳), 비랑(備郞)을 지냈다. 1808년(순조 8)~1810년(순조 10)까지 제234대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 진도군수 재직 시절 조도면 주민 차돌금 등 6명이 표류하여 일본에 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이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조치를 소홀히 하였다 하여 1810년 초에 조사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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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문신. 제299대 진도군수로,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장기 재직하였다. 민영진이 진도군수로 부임하던 1901년은 전국적으로 심한 흉년이 들었다. 정부에서는 1901년 10월 혜민원(惠民院)을 설치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호하기에 힘썼다. 또한 1901년 10월에는 안남미(安南米)를 수입하여 기민(饑民, 굶주린 백성)들에게 풀어야 했을 만큼 흉년이 심하였다.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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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밀양. 증조부는 박문량(朴文良)이고 아버지는 박종수(朴宗秀)이다. 동생은 박난룡(朴亂龍)이다. 부인은 창녕조씨이고 아들이 3명 있다. 무과 출신으로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동생 박난룡(朴難龍)과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전하였다. 동생이 전사하자 넝쿨로 시신을 감싸 담은 후 적을 참획하였다. 그 공로로 임금이 즉석에서 그의 직급을 절충장군(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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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익선(翼仙), 호는 경신재(敬愼齋). 진도 입도조 박희정(朴希貞)의 6세손이며, 아버지 박윤(朴潤)과 어머니 장흥임씨 임순공(任純恭)의 딸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밀양박씨로 아들 박춘(朴春), 박하(朴夏), 박추(朴秋) 3형제를 두었다. 손자 박승종(朴丞宗)은 제주판관을 지냈다. 소재 노수신(盧守愼)[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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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 1756년~1758년까지 3여 년 동안 제203대 진도군수로 재임하였다. 박사검이 진도군수로 있던 시기에는 잇따른 흉년으로 세곡이 바닥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세수(稅收)를 늘리기 위해 군량미(軍糧米)의 확보나 진곡(賑穀)의 회수가 부진한 지방 수령을 엄하게 문초하였다. 조정에서는 군량미 확보의 성적을 삼등분(三等分)하였다. 제일 성적이 나쁜 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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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충백(忠伯). 진도 입도조(入島祖) 청재공 박심문(朴審問)의 손자이자 박용의 숙부인 박평이 박상하의 7대조이다. 아버지는 판관 박시감(朴始瑊)이며, 어머니는 김해김씨이다. 박상하의 부인은 전주이씨이며,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4형제를 두었다. 박상하는 1648년 현재의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포산리에서 태어났다. 1672년(숙종 2)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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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효자. 본관은 밀양. 할아버지는 박후령(朴厚齡)이고 아버지는 박인복(朴麟福)으로, 모두 임진왜란 시 순절하였다. 형은 박성(朴晟)이다. 1567년 현재의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에서 태어났으며 박윤순(朴允淳) 등 4형제를 두었고, 1644년에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군량미를 모아 선혜청에 바치는 공을 세웠다. 또한 평소 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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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 임진왜란 시 순절한 박후령(朴厚齡)의 손자이며 박인복(朴麟福)의 아들이다. 아우는 박섬(朴暹)이다. 부인은 무안박씨이며 아들은 박윤소(朴允素)이다. 1566년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에서 태어났고, 음직으로 참봉에 나아갔다. 참봉으로 재직하고 있던 1628년(인조 6), 유효립(柳孝立)의 난을 평정하였고, 그 공으로 소무공신(昭武功臣)에 녹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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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지족당(知足堂). 청백리 박수지(朴遂智)의 5대손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잡고 난정을 하자 이를 통박하다가 그의 무고로 10년간 철산(鐵山)에 유배되었다. 1623년(인조 원년) 10월 인조반정으로 특별히 기용되어 양주목사에 제수되었다가 그 해 12월에 진도군수로 부임하였다. 진도군수로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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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신숙(愼叔), 호는 청재(淸齋). 세종 때 집현전 학사(學士)와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박강생(朴岡生)의 셋째 아들로 진도에서 태어났다. 박심문의 할아버지 박침은 여말선초 이군불사(二君不事)의 충절로 유명한 두문동(杜門洞) 72현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박심문은 사온서직장(司醞暑直長)이 되었다가 1436년(세종 18) 과거에 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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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밀양. 호는 지곡(芝谷). 아버지는 입향시조인 박용(朴容)이며, 어머니는 진도 토호였던 창녕조씨 조필(曺弼)의 딸이다. 3남 중 장남이며 아우로 박정(朴挺)과 박동(朴棟)이 있다. 부인 또한 창녕조씨인 조한성(曺漢成)의 딸이다. 무과에 합격하여 관직이 참군(參軍)에 이르렀고, 조복명(曺復明) 등과 함께 진도군 설치에 공을 세웠다. 묘소는 전라남도 진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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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인수(仁叟). 아버지는 박후령(朴厚齡)이다. 부인 정주한씨(定洲韓氏)와의 사이에 박성(朴晟), 박섬(朴暹) 등 형제를 두었다. 1550년(명종 5) 현재의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에서 태어났다. 박인복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세 가지 기록이 상충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나온『진도읍지』에 의하면, 박인복은 임진왜란 때 순절했고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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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밀양. 할아버지는 박연(朴衍)이고, 아버지는 박문량(朴文良)이며, 어머니는 진도군수 홍처성(洪處誠)의 딸이다. 부인은 창령조씨이며,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박희창(朴希昌)과 박희화(朴希華)를 두었다. 박종은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진만호(梨津萬戶)로 재임 중 임진왜란을 맞았으며,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여러 해전에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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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의 동학교도·농민군 지도자. 박중진(朴仲辰)은 1894년 7월에 일어난 전라남도 진도군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이다. 본관은 밀양. 호는 문화(文化)이다. 밀양박씨 규정공(糾正公)[박현]파 26세손이다. 6대조 박덕환(朴德煥)[1710~1783] 때 진도군 조도면에 들어왔다. 손자가 진도군 조도면 창리에 살고 있다. 박중진의 딸은 진도읍내 동외리에 사는 김흥찬(金興贊)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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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삼별초가 진도를 근거지로 기세를 떨치고 있을 때, 고려 정부와 몽고는 삼별초를 회유하기 위해 몽고 사신 두원외(杜員外)와 함께 박천주(朴天澍)를 1271년(원종 12) 1월 6일 진도로 보냈다. 삼별초는 회유하러 온 두원외와 박천주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는 몰래 병선(兵船) 20척으로 관군을 습격하여 배 1척을 나포하고 군사 90명을 죽이고 두원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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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밀양. 호는 송암(松庵). 밀양박씨 진도 입도조 박용(朴容)의 둘째 아들인 박정(朴梃)의 손자로, 아버지 박충손(朴忠孫)[1520~?]과 어머니 무안박씨 사이에서 4남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현재의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포산리이다. 부인은 김해김씨이다. 임진왜란 때에 순절한 김성진의 고모부이기도 하다. 절충장군 부사용으로 하수평(河水萍)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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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밀양. 밀양박씨 청재공파 진도 입도조 박용(朴容)의 아들인 박동(朴棟)의 증손자이다. 아버지는 박배근(朴培根)이고 어머니는 함양박씨이다. 아들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박인복(朴麟福)이다. 큰손자 박성은 유효립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고, 작은손자 박섬은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530년대에 현재의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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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1464년(세조 10)~1467년(세조 13)까지 제13대 진도군수로 재임하였다. 박후생은 진도군수로 부임한 후, 1207년(고려 희종 3년)에 창건되었으나 잦은 왜구 침입과 여말선초의 어수선한 상황 때문에 버려져 있던 벽파정(碧波亭)을 1465년(세조 11)에 중건하였다. 벽파정 준공 직후 그의 친구였던 이숙감(李淑瑊)이 진도에 와서 진도의 풍광과 벽파진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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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인. 본관은 경주(慶州). 1923년 간행된『진도군지』에 의하면, 진도 설군 유공자 박근무(朴根茂)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박형손(朴亨孫)이고 어머니는 김인수(金仁秀)의 딸 이다. 1537년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90년 무과에 급제하고 고향 동지인 이천구, 김수생 등과 같이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1597년 9월 16일 명량대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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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삼별초를 이끌었던 장군. 배중손이 역사에 뚜렷이 부각되는 것은 삼별초의 대몽항전 이후부터이며, 그 이전의 경력은 자세하지 않다. 왕정복고파와는 달리 대몽항전의 지속을 주장하였던 임연(林衍) 부자 계열에 속하는 무인으로, 임연 부자의 몰락 후에 대몽 강경파의 선봉에 서서 비타협적 항전을 계속한 인물이다. 배중손은 서반의 장군인 동시에 가장 유력한 삼별초의 지휘관이었던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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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백동리 신동마을 연대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연대지. 진도군 임회면 백동리 연대지는 신동마을 북동쪽 100m 지점 연대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동쪽은 상굴포와 짝별 사이에 내만 된 해안이 형성되어 있고 북동쪽으로는 상망거리(相望距離) 내에 여귀산봉수대가 위치한다. 이 여귀산 정상에서는 주로 북쪽 해안이 잘 조망된다. 연대는 정상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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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서 발굴된 중국의 통나무배. 진도 통나무배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78년으로, 월간지『예향』에 실린 삼별초 관련 답사기행문에서이다. 이를 근거로 문화재청에서는 현장을 답사하고 조사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같은 해 11월 조사원을 현지에 파견하여 매몰선의 실체를 확인,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노출된 유구의 형상으로 보아 선체일 가능성이 있으나, 시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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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봉상리 봉상마을에 있는 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 석교리에서 송정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 2㎞ 정도 가다 보면 봉상마을이 있다. 유적은 봉상마을의 서쪽 구릉에 위치한다. 유물은 구릉의 정상부와 북쪽 경사지에서 집중적으로 수습되었는데, 적갈색연질토기와 겹아가리토기의 아가리 등이 확인되었다. 이곳은 여귀산에서 봉상리 마을로 이어지는 지맥의 낮은 구릉에 해당하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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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정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변경의 정세를 중앙에 급히 전달하는 군사·통신시설. 진도에는 6개소의 봉수 유적이 남아 있다. 우선 첨찰산 봉수는 진도에서 가장 높은 해발 460m의 첨찰산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귀산 봉수는 진도 남부에서 가장 높은 해발 457m의 여귀산 봉우리에 위치한다. 상당곶 봉수는 여귀산 남쪽 해발 204m의 오봉산 봉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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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과 섬, 섬과 육지 사이에서 배를 보내라고 불을 피워 연락하는 장소. 배가 없는 섬에서 다른 섬이나 육지로 갈 때 혹은 섬으로 가려고 그곳의 배를 부를 때는 불을 피워서 연락한다. 연락은 봉수(烽燧)나 마찬가지로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을 피운다. 바다에서 불을 피워 교통을 해결한 역사는 매우 오래 전 일이며, 이와 더불어 조난에 대한 구조는 뱃사람들에게 있어서 공통된 과제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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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사령리 사동마을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십일시리에서 매정리 쪽으로 약 1.5㎞ 정도 가면 사동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 입구에서 100m 정도 마을 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길 우측과 야산 서쪽 도로와 접하는 경사면에 2기의 고인돌이 있다.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 시 새로이 발견된 유적이다. 길 우측 논두렁과 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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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또는 의신면에 설치된 조선 전기의 수군 시설. 사월포에 언제 군대를 주둔시키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1457년(세조 3) 1월 16에 진도 동면에 있는 사월포(沙月浦) 수군진을 혁파하여 본포로 옮긴다 했다. 여기서 본포는 금갑도이다. 당시까지 금갑도에는 권관(權管)을 배치했으나 만호진(萬戶鎭)으로 승격시킨다 했다. 사월곶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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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정권기에 특수부대였던 삼별초가 몽고의 간섭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 무인정권(武人政權) 말기 최우가 집권하여 도적이 횡행하자, 이들을 잡기 위해 용사를 선발, 경찰부대를 조직하고 이를 야별초(夜別抄)라 하였다. 그 뒤 인원이 늘고 기구가 확대되어 좌별초·우별초로 나누어져 편성되었다. 이후에 몽고군에 잡혔다가 탈출해온 군사와 장정들이 새로 신의군이라는 별초부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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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상가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상가리 고인돌군은 세 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다. 가군 고인돌은 분토리에서 상가리로 들어오는 마을 입구 왼쪽 밭에 8기의 고인돌이 동서 2열로 흩어져 있으며, 나군 고인돌은 벽파에서 상가리로 들어오는 마을 입구 오른쪽 밭에 3기의 고인돌이 동서 1열로 놓여 있다. 다군 고인돌은 상가리에서 송산리 쪽으로 도로를 따라 5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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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송산리 상가마을에 있는 삼국시대 유적. 송산리 상가유적은 농로 확장·포장공사와 농업용수 공급을 위한 급수지를 시설하기 위해 2004년 (재)전남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움집 터 1기, 구덩유구 1기가 조사되었다. 유물로는 움집 터 내부에서 적갈색연질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군내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500m 정도 가다 보면 상가마을에 이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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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고인돌은 상만리 마을 내 민가에 위치하는데, 상만리는 여귀산의 지맥인 안산의 남동쪽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상만리 마을회관 오른쪽에 동복오씨 사우로 올라가는 길이 있으며,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을 중간쯤에 강문수씨 가옥이 있다. 가옥 안쪽 담장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대형 석재가 있다. 하부구조나 받침돌은 현재 담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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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서망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서망리 고인돌군은 두 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으며, 가군에 17기, 나군에 20여 기의 고인돌이 흩어져 있으나 나군의 경우 심하게 파손되어 자연석과의 구분이 모호한 것들이 많다. 가군 고인돌은 팽목에서 서망리 마을로 들어가는 오른쪽 밭에 있고, 나군 고인돌은 서망리 마을 좌·우측 밭과 민가에 흩어져 있다. 1979년 전남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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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석교리 고인돌군은 두 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다. 가군 고인돌은 석교리 석교중학교에서 동쪽 고방리로 가는 농로를 따라 400m 정도 가서 오른쪽 산길로 가면 6기가 군집해 있다. 나군 고인돌은 석교리에서 봉상리로 향하는 도로의 좌우측에 있다. 석교리 고인돌은 1968년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에서 남해안 도서 지역을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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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석현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 고군면 소재지에서 진도읍 쪽으로 국도 18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석현리에 이르게 된다. 유물산포지는 석현리에서 북서쪽으로 300m 정도 떨어져 있는 ‘당산골’로 불리는 계곡부의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적갈색연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현재 이곳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유물산포지 내에 고인돌군이 있었으나 3년 전 마을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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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사신(思愼), 호는 친친재(親親齋). 판서 선형(宣炯)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도사(都事) 선상(宣祥)이다. 1550년(명종 5)에 태어났다. 1570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군관, 거제현령, 진도군수, 성주목사, 전라도수군절도사, 충청병사, 황해병사를 역임하였다.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 때 49세로 전사하였다. 1569년(선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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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과 함께 대표적인 거석문화의 일종. 한자로 세워져 있는 돌이라 하여 선돌로 부른다. 선돌을 다른 용어로 입석이라고 하는 데 켈트어로 돌(石, men)과 높다(高, hir)라는 의미로 멘히어(Menhir)라 하며, 영어로는 Standing Stone, 희랍어로 Monolith라 한다. 일반인들은 선돌을 입석 외에 선바우, 벅수, 수구맥이, 돛대바우, 좆바우, 보지맥이, 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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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에서 발견된, 역사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시대의 유적과 유물. 선사유적은 유적의 환경조건이나 자연적 자원의 활용에서 상대적 가치를 보여주는 위치에 따라 야외유적, 바위그늘유적, 동굴유적, 해안유적, 산정상부유적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또 과거에 유적이 가졌던 기능에 따라 주거유적, 생활유적, 생산유적, 제철유적, 농경유적, 사냥터유적, 무덤유적, 교역유적 등으로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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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삼막리 선항마을에 있는 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 진도읍에서 임회면으로 향하는 18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선항마을이 나온다. 유적은 선항마을의 북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삼막봉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선항마을 뒷산(190m)의 서쪽 경사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마을까지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삼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회청색경질토기편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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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성남리 성남마을에 있는 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 성남도는 진도군 조도면 상조도의 북동쪽에 위치하는 섬인데, 성남 유물산포지는 이 섬에 위치하고 있다. 진도군 조도면 성남도에서 처음 토기를 발견한 것은 1983년의 일이다. 그 후 여러 차례 현지조사를 통해 다수의 토기편을 수습할 수 있었다. 토기편은 성남분교 바로 옆, 마을회관 바로 뒤편에 위치하는 곳에서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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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고인돌 1기가 진도읍에 소재한 진도중학교 뒤편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규모는 390×200×40㎝이며, 덮개돌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고, 장축방향은 동-서이다. 하부구조는 확인되지 않았다. 현재 계단식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주변에 민가와 진도읍성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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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유물산포지. 성내리 유물산포지는 진도읍에 소재한 진도중학교 뒤편의 구릉상에 자리한다. 구릉은 북산[289.5m]에서 흘러내려 온 토사에 의해 형성되었는데, 유물산포지는 북산의 남쪽 산사면 말단부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기와편과 자기편 등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현재 계단식밭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가까운 곳에 민가와 진도읍성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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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에 설치된 조선 전기의 수군시설. 현재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의 이름이 조선 전기에는 소가포(蘇可浦) 또는 소가포(所可浦)였던 데서 유래하였다. 1432년(세종 14) 10월 20일에 진도 서면 소가포(蘇可浦)에 수영의 병선 3~4척을 윤번으로 배치시켰다. 이곳의 군 주둔은 25년 만인 1457년(세조 3) 1월 남도포(현재 임회면 남동리) 만호진으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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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무리. 소포리는 지산면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는 마을이다. 유적은 소포리 마을 입구 도로변에 2기가 있었고, 마을주민 조인섭씨 집 마당에 3기가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는 마을길과 조인섭씨 집을 재건축하면서 파괴되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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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동학운동 지도자. 진도군 고군면 마산리 출신으로 가계를 면에서는 확인할 수 없고, 손씨 족보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진도군 고군면 마산리 의병골창이란 곳에서 동학 의병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김수종(金秀宗)와 함께 진도에서 동학 활동을 하였다. 정부가 동학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화해 정책을 펴고 있을 때 동학군은 면·리 단위 집강소를 설치하여 민정을 맡아 보았다. 진도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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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치원(致遠), 호는 조은(釣隱). 무예에 뛰어나 1585년(선조 18)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훈련원 첨정으로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여 호위장군(虎威將軍)의 호를 받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진도군수로서 진도 관군을 이끌고 전공을 세워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서훈되고, 부령부사가 되었다. 임치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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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송산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진도-해남간 국도변, 속칭 ‘세등고개’ 왼쪽 구릉에 8기의 고인돌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다. 송산리 고인돌군은 원래 15기였으나 그 수를 헤아릴 수 있는 것은 8기뿐이다. 1968년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에서 남해안 도서 지역의 고고학적 조사 때 13기가 발굴되어 처음 학계에 알려졌다. 그 후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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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송산리 송산마을에 있는 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 진도대교를 지나 국도 18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군내면 송산리 송산마을에 이르게 된다. 유물산포지는 송산마을 북동쪽에 자리한 구릉상에 위치한다. 유물산포지 내에는 송산리 고인돌군이 자리하고 있다. 유물로는 회청색경질토기편, 적갈색연질토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현재 이곳은 도강김씨 세장산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맞은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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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송월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송정리 마을에서 상만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 300m 정도 가다 보면 길 왼쪽에 송월리가 자리 잡고 있다. 송월리 고인돌은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때 새로 발견된 유적이다. 송월리에 산재하고 있는 고인돌 가운데 2기가 받침돌을 괴고 있어 기반식(남방식, 바둑판식) 고인돌의 형태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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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봉상리 송월마을에 있는 청동기에서 고려시대까지의 유물산포지. 봉상리에서 상만리로 가다 보면 송정마을을 지나 도로 왼쪽으로 평지가 펼쳐지는데, 이곳에 청동기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산포되어 있다. 이곳은 마을주민들이 ‘간대들’이라 부르는 곳으로, 여귀산에서 뻗어내린 지맥과 지맥 사이의 곡간지에 해당한다. 유물산포지에는 파괴된 고인돌의 덮개돌들이 산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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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송정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송정리 고인돌군은 두 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다. 가군 고인돌은 송정리 마을 앞 논과 논두렁에 20여 기의 고인돌이 흩어져 있다. 송정리에서 ‘돌막고개’로 100m 정도 올라가면 우측 민묘 바로 위에 고인돌 1기가 있으며, ‘돌팍고개’ 정상 이길홍씨 소유 밭에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고인돌 1기가 있다. 나군 고인돌은 송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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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송정리 송정마을에 있는 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 의신면 돈지리에서 송정리로 가는 18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송정저수지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다. 이곳은 왕골산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야산의 북쪽 사면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평행문에 횡침선이 시문된 경질토기편과 회백색 연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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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수역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무리. 수역리는 진도읍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고인돌은 수역리 마을 입구의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진우농원방조제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고인돌군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있는 고인돌은 총 6기로 가장 큰 규모의 덮개돌은 160×140×80㎝이며, 지표상에 받침돌들이 노출되어 있다. 덮개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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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신동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송정마을에서 신동간 길을 따라 왼쪽 200m 지점 김현숙 씨 소유의 밭에 고인돌 1기가 있다. 경지 정리 전에는 2기의 고인돌이 있었다고 한다.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때 발견되어 조사되었다. 고인돌은 덮개돌 아래쪽이 지표 아래에 묻혀 있어 받침돌의 유무 등 형식을 확인할 수 없으며, 아래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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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정오(靜吾), 호는 현포(玄圃). 증조부는 신숙(申淑)이고 조부는 신중엄(申仲淹)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신식(申湜)이고 어머니는 광주인(光州人) 노개(盧塏)의 딸이다. 처는 동래인 정창연(鄭昌衍)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생원시에 합격하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성균관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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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원서(元瑞)·군서(君瑞), 호는 묵재(默齋)·묵치(默癡)·적안(適安). 첨정(僉正) 신목(申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성 신민일(申敏一)이고, 아버지는 부사 신상(申恦)이며, 어머니는 이흥인(李興仁)의 딸이다. 동생으로 신명륭(申命隆)이 있고, 아들에 신유, 신임, 신심, 손자에는 신사철(申思喆), 신사영(申思永), 신사건(申思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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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3년부터 1725년까지 제172대 진도군수를 지낸 조선후기의 관리. 진도군수로 부임했던 신박은 1725년(영조 1)에 장령 이의천(李倚天)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내용은 대촌(大村)을 강제로 훼손하고 뇌물을 받았고, 재해 면적을 속여 세수 차액을 횡령하였으며, 관비에게 빠져 문란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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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재상. 신사전(申思佃)은 무반으로 관직에 나아간 듯하며 1260년(원종 1)에 상장군에 올랐다. 1263년(원종 4)에 병부상서가 되었고, 이후 재추의 반열에 들었다. 1268년(원종 9)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고, 뒤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다. 찬성사(贊成事)로 치사(致仕)하였고, 1289년(충렬왕 15)에 생을 마감하였다. 1259년(원종 즉위) 고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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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신육리 육동마을에 있는 선돌. 마을주민들의 제보에 따르면 조도면 신육리 선돌들은 ‘제 받아먹는 돌’이라고 한다. 연유는 보호수와 함께 당산제 때 제의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산제는 30여 년 전부터 중단되었다. 진도군 조도면 신육리 육동마을에는 2기의 선돌이 있다. 육동 아랫마을 보호수와 함께 1기가 있고, 그 인근 밭 주위에 또 다른 1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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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신정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거룡리에서 임회면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신정리가 있다. 이 마을 입구 못 미쳐 도로 좌측의 구릉성 밭에 고인돌 1기가 위치한다. 덮개돌은 동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덮개돌 아래에는 2개의 받침돌이 확인된다. 덮개돌의 크기는 312×280×42㎝이고, 평면형태는 방형이다. 장축방향은 남북이다. 대덕산[22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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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거룡리 신정마을에 있는 삼국시대 유물산포지. 돈지리에서 송정리로 가는 18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거룡삼거리가 있고, 여기서 거룡리 방향으로 1㎞ 정도 가면 신정마을 입구에 이르게 된다. 유적은 신정마을의 서북쪽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삼막봉의 동쪽 지맥과 이어지는 ‘큰덕골’이라는 곡간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회갈색의 연질토기편과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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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유생. 1822년(순조 22) 2월에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강세귀(姜世龜), 이광좌(李光佐)를 성토하는 통문(通文)을 돌려 진도군 의신면 금갑도에 정배하여 노비가 되었다. 1832년(순조 32) 7월에 방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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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여인(汝仁).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신양(申瀁), 할아버지는 신응징(申應澄)이다. 처는 용인인 이태악(李泰岳)의 딸이다. 1711년(숙종 37)에 진사(進士)에, 1721년(경종 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725년(영조 1)에 정언, 사서(司書), 1726년(영조 2)에 지평(持平), 장령(掌令), 1727년(영조 3)에 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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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심동리 윗심동마을에 있는 성터. ‘성재’는 북편 석적막산(石積幕山)과 동편 급치산(急峙山) 사이의 801번 도로 아래에 위치한다. 이곳은 윗심동마을로부터 북서쪽으로 1㎞ 정도 떨어진 곳으로서, 주위의 산들은 대개 직립(直立)한 암산(岩山)이다. ‘성재’를 넘어서면 조도해성(鳥島海城)과 접하고, 마을의 동남쪽으로는 심동저수지와 인접해 있다. 도로에서 약 3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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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쌍정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벽파에서 진도읍으로 들어오는 입구 도로변(서쪽)에 1기가 위치하고 있다. 1968년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에서 남해안 도서 지역을 대상으로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했을 때 1기가 발견되어 처음 학계에 알려졌다. 그 후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재조사하였다. 쌍정리 고인돌은 받침돌이 보이지 않지만 덮개돌의 형태나 규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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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삼별초의 토벌에 참여한 몽고 원수. 1270년(원종 11) 몽고 원수 아해(阿海)는 전라도추토사로 임명된 김방경과 함께 진도로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해 갔다. 아해는 김방경과 함께 삼견원(三堅院)에 주둔하면서 삼별초와 여러 날 대치하였다. 대치하던 중 반남 사람 홍찬(洪贊)·홍기(洪機)가 아해에게 “김방경과 공유 등은 비밀리에 반적과 서로 내통하고 있다.”고 고하였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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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1255년(고종 42) 판사천국사(判司天局事) 안방열은 몽고군에게 파괴당한 지릉(智陵)[명종의 능, 경기도 장단군]을 수축하였다. 1259년(고종 46) 술사 백승현(白勝賢)이 강화의 삼랑성(三郎城)에 가궐(假闕)을 지으면 왕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진언하였다. 왕이 안방열에게 가궐 건축의 이로움과 해로움에 대해 묻자 “백승현의 말은 믿을 수는 없으나 한번 시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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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학천자(鶴川子). 안동신(安桐臣)의 아들로 1612년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인목대비의 폐비 불가론을 주장하며 이이첨 무리를 공격하는 상소를 했다. 1614년 진도에 유배되어 2년 만에 풀려났으나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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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제주. 자는 여숙(麗淑), 호(號)는 사양재(思養齋). 할아버지는 집현전 대제학 양동재(梁棟材)[혹은 碩材]이고, 아버지는 경상 병마절도사 양한서(梁漢瑞)이다. 부인은 대제학 박강생(朴剛生)의 딸이다. 아들 양정명(梁井明)이 있다. 양성지가 그의 후손이다. 1394년(태조 3) 2월 9일에 태어났다. 구례현감, 해진군사, 진도군수 등을 역임하고 14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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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임진왜란 시 공을 세운 무신. 본관은 제주. 호는 호재(浩哉)이다. 아버지는 양관세(梁觀世), 어머니는 김석곤의 딸이다. 임진왜란 순절 충신 양응지(梁應池)와 숙질간이다. 1564년 진도군 군내면 상가리에서 태어났다. 무과 급제 후 훈련원지사 겸 의금부도사를 역임하였다. 1597년 순절하였다. 수은(睡隱) 강항(姜沆)[1567~1618]과 교류가 있을 정도로 학문이 독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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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제주(濟州). 진도 입도조 양진회(梁進淮)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양정(梁渟)이다. 1548년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상가리에서 태어났다. 문장에 뛰어나고 무예도 탁월하여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으로 종부시와 사복시주부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질인 양계원(梁啓源)과 함께 군량과 의병을 모았다. 그 후 이순신 휘하에서 무공을 세우다 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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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제주. 제주양씨는 고려 말엽의 인물인 양보숭(梁保崇)을 중시조로 삼아 계대(繼代)하는데, 그의 5세손으로 양석재(梁碩才)와 양동재(梁棟材) 형제가 있다. 이 중 양동재는 전라남도 나주군 다시면 시랑동에 살았는데, 양진회(梁進淮)는 그의 증손자이다. 양진회의 부인은 동복오씨이고 아들은 양우치(梁寓治)이다. 양진회는 나주에서 살다가 진도에 들어왔다. 진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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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월서(月瑞), 자는 문찬(文贊), 호는 칙헌(則軒)·초계[初桂, 草溪].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증호조판서 양맹석(梁孟錫)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이다. 1844년(헌종 10)에 태어났다. 임오군란시 의병을 일으켰으며, 선략장군 부사과(宣略將軍副司果), 통훈대부초계군사 겸내금위장(通訓大夫草溪郡事兼內禁衛將)에 제수되고 이어 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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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여미리 돈대봉에 있는 돈대(墩臺) 터. 여미리 돈대지는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여미리의 돈대봉에 위치한다. 돈대란 성벽 위에 석재 등을 쌓아올려 망루와 포루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든 높은 누대를 말하는데, 여미리 돈대지는 옛 지도와 구전에 의해 존재를 알 수 있을 뿐 현재는 여미리 돈대의 형태가 남아 있지 않다. 여미리 돈대지 유적은 진도군 조도면에 있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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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여미리 동구마을에 있는 조선시대 성터. 진도군 조도면 동구리는 좌우, 뒷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면은 바다에 임해 있다. S자로 내만 된 전방의 해안은 천연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바다 쪽에서는 동구리 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현재 마을 앞에는 제방이 축조되어 있어서 염전과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성은 동구리에서 율목으로 넘어가는 속칭 ‘성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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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에 유배되었던 조선 전기의 문신. 1396년(태조 5) 제주목사로 재직시 임금으로부터 비단과 쌀 30석을 하사받았다. 1404년(태종 4) 전서로 있던 여의손이 일본국에 보빙사로 갔었는데, 이 때 사신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여 1406년(태종 6) 2월에 탄핵받아 향리 안치를 받았으나 다시 사헌부의 이의 제기로 진도에 유배되었다. 이후 『세종실록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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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연동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벽파리의 행정리인 연동리 마을 앞 논과 밭, 민가에 10여 기가 흩어져 있다. 양명희씨 집 안에 두께가 300㎝가 넘는 거석이 놓여 있는데, 일명 ‘천지바위’라고도 부른다.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조사·보고되었다. 일부 덮개돌이 파괴되고 아래쪽이 매몰되어 있어 확실한 형식을 알 수 없으며,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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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연산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생활유적지. 진도대교를 지나 국도 18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둔전리 연산마을에 이르게 된다. 연산리 유물산포지는 둔산제로 불리는 저수지의 북동쪽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1981년도에 개간하여 현재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진도군 문화유적 조사시 처음 발견된 유적으로 1987년 학계에 보고되었다.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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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연주리 연주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유물산포지. 801번 도로를 따라 고군면 가계리에서 의신면 쪽으로 가다 보면 북서쪽으로 산줄기를 돌아 연주마을에 이른다. 마을로 들어가서 바다 쪽 소로를 따라가면 계단식 농경지가 경작되고 있고, 이곳에 조선시대 유물이 확인된 ‘소장골’이 있다. 소장골은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어 작은 만을 이루는 지역으로, 양쪽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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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1602년부터 1604년까지 제95대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 1602년(선조 35)에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오대남은 정사(政事)를 말단 관리에게 위임하여 처리하게 하였고, 또한 잦은 징세로 군민의 원망과 고통이 극심해져 탄핵을 받게 되었다. 그간 진도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온갖 고초를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군수마저 악정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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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오산리에 있는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 고군면소재지에서 지방도 801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오상리에 이르게 된다. 선돌은 마을에서 북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일명 ‘선바위’라 불리고 있으며, 주변에 오상리 고인돌이 있다. 1968년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에서 실시한 남해 도서지역 고고학 조사시 발견되어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되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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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오산리에 있는 철기시대의 주거유적. 고군면소재지에서 지방도 801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오상마을에 이르게 되는데, 오산리 유적은 오상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진도군 문화유적 조사시 처음 발견된 유적으로 1987년 학계에 보고되었다. 2003년 경지정리사업의 일환으로 전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조사 당시 ‘오산리유적 가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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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오상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오상리 고인돌군은 세 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다. 가군 고인돌은 오산리 저수지 제방 밑에 4기가 동서 1열로 놓여 있다. 이곳에서 내동리 마을 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섬바위’라는 선돌이 있는데 선돌 옆에도 2기의 고인돌이 있다. 나군 고인돌은 오상리 마을 북쪽 넓은 경지 쪽 낮은 구릉상에 6기가 군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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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옥대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돈지리에서 옥대리로 가다 보면 옥대리 마을 좌측 구릉상에 21기의 고인돌이 타원형을 이루며 모여 있다. 주변에 많은 석재가 널려 있어 고인돌의 아래쪽이 파괴된 것으로 추측된다.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때 조사되었다. 고인돌의 아래쪽이 매몰되고 파괴되어 확실한 형식을 알 수 없다. 규모는 일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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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옥대리 옥대마을에 있는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유물산포지. 돈지리에서 옥대리로 가다 보면 옥대마을의 서쪽으로 낮은 구릉이 형성되어 있고, 이곳에 옥대 고인돌군과 함께 유적이 위치한다. 이곳은 강성봉[204m]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구릉의 말단부 평지에 해당된다. 이곳에서 수습된 유물로는 적갈색연질토기편,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있다. 현재 유적의 남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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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9년 왕건이 후백제 땅이었던 진도를 점령한 사건.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면서 진도를 비롯한 서남 해안 지역은 그 세력권 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901년 견훤이 서남 해안 일대의 금성 지역 부락들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자 금성 지역의 토호(土豪)들은 궁예 정권에 내부(內附)하여 훤호를 요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903년 궁예는 왕건에게 금성 일대를 정복하도록 하였고, 개경 지역 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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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왕족으로 진도현에 유배된 인물. 1153년(의종 7)에 고려 18대 국왕 의종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장경황후 김씨이다. 초명은 왕홍(王泓)이고, 효령태자(孝靈太子)로 봉해졌다. 1170년(의종 24) 무신난을 일으킨 정중부는 의종은 거제도로 유배시키고, 태자 왕기는 영은관으로 옮겼다가 진도현으로 유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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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왕족으로 삼별초에 의해 진도에서 왕으로 추대된 인물. 왕온은 고려 현종의 8대손이다. 청화후 왕경(王璟)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제로 왕서·왕염(王剡)·왕정(王珽)이 있다. 아들은 왕환(王桓)이다. 왕춘(王瑃)·왕희(王禧)·왕기(王祺)가 숙부이다. 승화후(承化侯)에 봉해졌다. 1270년(원종 11) 고려와 몽고가 강화하기로 하고 왕실이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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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왕족. 고려 현종의 9대손이다.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의 아들이며,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의 조카이다. 형제로는 왕희(王熙)·왕함·왕시·왕화(王和)·왕림(王琳)이 있다. 아들은 왕미이다. 신안후에 봉해졌다. 1270년(원종 11) 삼별초가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진도에 웅거하자, 고려 조정은 왕옹을 아우 왕희와 함께 파견하여 삼별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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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왕족. 고려 현종의 9대손이다.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의 아들이며,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의 조카이다. 형제로는 왕옹(王雍)·왕함·왕시·왕화(王和)·왕림(王琳)이 있다. 아들은 왕형(王珩)·왕구(王玖)이다. 광화후에 봉해졌다. 1270년(원종 11) 삼별초는 반란을 일으키면서 왕희의 숙부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를 점령하였다.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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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외동산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월가리의 행정리인 외동산리의 ‘동삼뫼’라고 부르는 낮은 구릉 남사면에 12기가 모여 있다. 1977년 문화재관리국의 『문화유적총람』에 처음 보고된 유적이다. 그 후 1979년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와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 때다시 조사되었다. 고인돌들은 덮개돌 일부가 이동되어 있고 하부가 도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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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분토리 외동산마을에 있는 철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유물산포지. 군내면에서 진도읍 쪽으로 국도 18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도로 우측에 분토리 외동산마을이 있다. 고인돌은 외동산마을의 저평한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다. 회색연질토기편, 흑갈색연질토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이곳은 현재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근처에 외동산 고인돌군 1, 2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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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외삼당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무리. 지산면 외삼당리 고인돌군은, 기존의 조사내용에 따르면 외삼당리 마을 앞 조그마한 냇가를 건너서 약 20m 지점의 계단식 논밭에 6기의 고인돌이 남북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외삼당리 고인돌군에 있는 6기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현재는 경지정리로 인해 모두 매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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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 있는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 용장리는 진도읍의 북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선돌은 모두 3기가 있는데, 선돌①은 마을의 북쪽 입구에 위치한다. 선돌②는 선돌①로부터 남동쪽으로 2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선돌③은 선돌②로부터 남서족으로 100m 정도 떨어진 마을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하였다. 용장리 선돌①의 크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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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용장마을에 있는 고려시대의 유물산포지. 용장리는 진도읍의 북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유물산포지는 용장마을 입구 주변에 위치하며, 마을주민들로부터 ‘가전들’로 불리고 있다. 서쪽으로 지방도 801호선이 지나가고 있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경작 중에 이곳에서 많은 양의 기와편들과 자기편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현재 밭과 논 주변에도 상당수의 기와편과 자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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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고군면 금계리 용호마을에 있는 삼국시대 유물산포지. 군내면 소재지에서 의신면 방향으로 18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도로의 왼쪽에 가계교가 나온다. 가계교를 지나 남서쪽으로 500m 정도 가면 용호마을이 있다. 용호 유물산포지는 마을의 북동쪽에 위치한 미봉[242m]에서 남동쪽으로 흘러내린 구릉사면에 ‘쉰배미골’을 중심으로 넓게 분포하고 있다. 유적의 앞쪽으로 향동천이 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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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승려. 웅천선사는 진도의 유서 깊은 사찰인 쌍계사의 상성암을 1212년(강종 원년)에 건립하였다. 그 외에 웅천선사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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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접도 원다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유물산포지. 금갑리 접도의 원다마을 남서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남망산[163.8m] 북쪽의 저평한 사면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현재는 계단식 밭으로 경작 중이다. 이곳에서는 회청색 경질의 토기편과 기와류 등이 다수 수습되었다. 원다마을은 옛날에 원님들이 많이 귀양 온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유배지마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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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만길리 원두마을에 있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유물산포지. 원두마을에는 두 곳의 유물산포지가 있다. 유물산포지①은 돈지리에서 송정리로 향하는 18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거룡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송정리 쪽으로 900m 정도 가면 길 오른편 밭에 유적이 있다. 이곳은 거룡마을 남쪽에 있는 야산(60m)의 남동쪽 사면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야트막한 구릉을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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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원포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때, 원포리에서 18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고인돌들은 대부분 아래쪽이 매몰되어 있어 확실한 형식을 알 수 없으나, 가장 큰 고인돌에 받침돌이 한 개 있는 것으로 보아 기반식과 뚜껑식이 혼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인돌의 크기가 일정치 않고 대형과 소형이 혼재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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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월가리에 있는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 진도읍에서 포장도로를 벗어나 월가리 쪽으로 접어들면 도로 동쪽에 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옆에는 주민들이 ‘미륵등’이라고 부르는 작은 고개가 있다. 이곳에서 월가리 쪽으로 300m 정도 가면 도로 동편에 1기의 선돌이 있다. 선돌은 원래 마을 우측의 저수지 부근에 세워져 있었으나 저수지를 만들 때 쓰러져 방치되었다. 그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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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월가리 월가마을에 있는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산포지. 월가마을은 외동산마을과 동쪽으로 마주보고 있다. 유물산포지는 월가마을 남쪽의 야트막한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다. 유물은 고려에서 조선시대의 기와편, 자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동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에 월가리 선돌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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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장흥. 고려 중기 예종대에 문장으로 명망을 떨치고 문하시중을 역임한 위계정(魏繼廷)이 9대조이다. 위충(魏祌)의 아버지는 위윤기(魏潤琦)이다.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면 방촌에서 태어났으며 그 후손들이 현재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에 살고 있다. 고려 후기에 조회와 의례를 맡아보던 합문(閤門)의 판사(判事, 정3품)를 역임하였다. 1391년(공양왕 3)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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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남동리 남산마을에 있는 위충의 묘. 진도읍에서 죽엽리로 향하는 803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남산교회가 있는데, 여기서 150m 정도 떨어져 유적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남산[245.3m]의 북쪽 경사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비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위충은 장흥 사람으로 용호장군(龍虎將軍) 윤기의 아들이며, 간성군사(杆城郡事) 수(脩)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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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남긴 유물이 발견되는 생활유적 추정지. 유물산포지는 고고학의 자료 수집단계인 지표조사를 통해 대부분 발견되지만 경작 등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된 유물도 많다. 유물산포지는 지표조사 과정에서 유물이 확인되거나, 지형상 유적이 분포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말한다. 유물산포지의 판별은 수습된 유물로 판단하게 된다. 수습유물은 완형보다는 대부분 조그마한 편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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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지역에 유배된 사람들이 유배생활 중에 지역 주민들과 교류하면서 형성된 중앙문화와 비교되는 지역문화. 유배문화란 어느 지역에 유배되어 온 사람들이 유배생활 중에 지역주민들과 교류하고 그들을 훈육하면서 중앙의 수준 높은 문물을 전해주어 발전된 지역문화를 말한다. 반대로 유배인 스스로가 유배지역의 토착문화나 민속, 예술 등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학문이나 경륜, 예술적 자질들을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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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진도군수를 역임한 관리. 1817년(순조 17)에 약 6개월 간 제243대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 진도군수 재직시 호서와 호남 지역이 풍작임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대동미를 제대로 상납하지 않았다는 죄로 충청남도 지역과 전라도 지역 수령 34명과 함께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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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진도군수를 역임한 관리. 1861년(철종 12)부터 1863년(철종 13)까지 제273대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 1861년(철종 12)에 진도군수로 부임한 이래 각종 부과를 무리하게 실시하여 군민들의 원성을 받았다. 이에 진도군 고군면 석현리 주민들이 주동이 되어 민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조정에서는 진도군수를 조존욱(趙存昱)으로 교체하였다. 유정로가 진도군수로 악정을 일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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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방숙(方叔), 호는 취옹(醉翁). 유영(兪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대의(兪大儀)이고, 아버지는 예조참의 통훈대부(通訓大夫) 유성증(兪省曾)이며, 어머니는 구준(具濬)의 딸이다. 아내는 풍천 임효달(任孝達)의 딸이다. 형으로 유황(兪榥)이 있다. 1606년(선조 39)에 태어났다. 문과 급제 후 검열, 사간, 경기도 관찰사, 대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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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자장(子長). 수안현(守安縣)[현재 경기도 양주] 사람이다. 삼한공신(三韓功臣) 윤봉(尹逢)의 7세손으로, 검교호부상서(檢校戶部尙書) 윤유연(尹裕延)의 둘째아들이다.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사마시에 합격 후 지수주사판관(知水州事判官), 현덕궁녹사(玄德宮錄事), 좌우위녹사참군사(左右衛錄事參軍事), 진도현령, 감찰어사, 상서도관원외랑(尙書都官員外郎)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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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아버지는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윤사수(尹思修)이다. 할아버지는 동지밀직(同知密直) 윤방안(尹邦晏)이다. 형제로는 형 윤처성(尹處誠)·윤처경(尹處敬)·윤처공(尹處恭)이 있다.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1442년(세종 2)부터 1444년(세종 4)까지 제4대 진도군수로 재임하였다. 1442년(세종 24) 진도군수로 재임하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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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양좌(陽佐). 아버지는 참판 윤경(尹坰)이고, 어머니는 이담(李擔)의 딸이다 147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종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1453년 저작을 거쳐 1455년 호조화랑에 원종공신 2등으로 책록되고 서연관이 되었다. 1463년 동부승지에 이어 도승지로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484년 영의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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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신육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고분군. 진도군 조도면 신육리 읍구마을에서 육동마을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500m 정도 가다보면 길 우측에 농로가 있다. 이 농로를 따라 산자락까지 들어가면 고분군이 위치한다. 이곳은 읍구마을의 북동쪽까지 이어지는 신금산[232m]의 지맥에 의해 형성된 완만한 곡간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읍구 고분군과 인접된 밭에 청자편이 산재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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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읍구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읍구리 고인돌군은 3기가 있는데, 하조도 신육리의 행정리인 읍구리에서 창유리로 넘어가는 고개 우편 언덕 위에 민묘와 함께 있다. 3기의 방향은 남북으로 열을 이루고 있으며 산기슭을 따라 내려오고 있다. 1984년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에서 처음으로 조사한 유적이다. 그 후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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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신육리 읍구마을에 있는 고려시대의 유물산포지. 진도군 조도면 창유리에서 신육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읍구마을에 이르고, 유적은 이 마을의 북서쪽 사면부에 위치한다. 이곳은 돈대봉의 동쪽 사면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나지막한 경사면을 이루며 읍구마을까지 이어진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청자편,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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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진도군수를 지낸 문신. 1769년부터 1772년까지 제210대 진도군수로 재임하였다. 본관은 전주. 할아버지는 이옹이고, 아버지는 이만종(李萬鍾)이다. 부인은 양순유(梁舜兪)의 딸이다. 형은 이상린(李祥麟)이다. 아들은 이언보(李彦輔)이다. 1769년 진도군수로 부임하였다. 진도군수로 임명받을 당시 어떤 내시가 진도에 있는 자신의 부모 안부를 부탁하여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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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 봉암(鳳巖)이다. 세종의 7대손이며, 증조부는 이구수(李耉壽), 할아버지는 첨정(僉正) 이극강(李克綱), 아버지는 목사 이수록(李綏祿), 어머니는 송제신(宋濟臣)의 딸이다. 아들로는 이민장(李敏章), 이민적(李敏迪), 이민서(李敏敍), 이민채(李敏采)가 있고, 동생으로 이정여(李正輿)가 있다. 아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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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희순(希醇), 호는 묵곡(墨谷)·묵암(墨巖). 태사(太師) 이도(李棹)의 후손이며, 부여감무 이의(李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이대종(李大種)이고, 아버지는 이영(李潁)이며, 어머니는 생원 채소명(蔡紹明)의 딸이다. 1458년(세조 4)에 태어났다. 문과 급제 후 검교, 정언, 좌승지, 전라도관찰사, 좌부승지, 경기도관찰사,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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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전기 진도에 유배된 인물. 고려 인종 때 척신 이자겸의 아들이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척준경(拓俊京) 등의 거사로 붙잡히는 난이 일어났을 때, 그 처와 큰아들 이지윤이 영광으로 유배되고 다른 아들들도 모두 유배되었다. 그 중 이공의는 진도에 유배되었다. 이공의는 진도군에 유배된 인물로는 최초인 것으로 나타난다. 진도가 고려전기라는 이른 시기에 이미 유배지로 활용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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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 아버지는 이달용(李達容)이다. 부인은 양천허씨 허성(許成)의 딸이다. 아들은 이하진(李夏鎭) 등 셋이다. 1838년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초하리에서 태어났고, 제주 대정(大靜)현감을 역임하였다. 1897년에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초하리 서당동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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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진도군수를 지낸 관리. 1711년부터 1712년까지 제165대 진도군수로 재임하였다. 1710년(숙종 36) 도총경력(都摠經歷)이 되었다. 1711년 진도군수로 부임하였으나 이듬해인 1712년 11월 10일 그의 부모가 70세가 넘었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였다. 비변사는 부모 나이가 70세가 넘으면 300리 밖에 관리로는 임용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사목은 부모 나이가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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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6년(선조 9)부터 1578년(선조 11)까지 제74대 진도군수를 지낸 조선 중기의 무신. 진도군수로 있던 1578년(선조 11)에 이른바 미옥사건(米獄事件)에 연루되었다. 당시 같은 전랑(銓郎)으로 있던 윤현과 김성일(金誠一)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때 동인 김성일은 진도군수 이수가 삼윤에게 쌀을 뇌물로 바쳤다는 정보를 입수해 이 사실을 폭로하였고, 대간은 이수를 탄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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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1559년부터 1561년까지 제64대 진도군수를 지냈다. 1565년(명종 20)에 연안부사, 1575년(선조 8)에 전라수사, 1578년(선조 11)에 남도우후를 지냈다. 남도우후로 있을 때 선조로부터 호초(胡椒) 1두(斗)를 하사받기도 했다. 진도군수로 있던 1561년(명종16)에 흑산도에서 왜인을 잡는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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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무신. 1270년(원종 11)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봉기하여 진도로 내려갈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강화도에 있다가 노비들을 모아 삼별초를 구포(仇浦)까지 추격하여 5명을 베었다. 또한 낭중(郎中) 전문윤(田文胤)과 함께 강화도의 부고(府庫)를 봉쇄하여 도적을 예방하였다. 이후 경상도 안찰사가 되었다. 1271년(원종 12)에 밀성군(密城郡)[현재 경상남도 밀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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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공. 아버지는 이정(李貞)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로 1545년에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 일본과의 관계가 미묘하고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1591년 2월에 정읍현감이던 이순신을 진도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부임 도중에 완도 가리포수군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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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비변사의 낭관을 지냈다. 1623년(인조 1) 이순혐이 허위로 계본(啓本)을 만들어 여러 관리들에게 돌리고 왕의 윤허까지 받은 일이 있었다. 그 내용은 “이순혐(李純馦)은 이미 3년이나 되었음에도 아직 실직(實職)으로 공로에 대해 보답하는 은전(恩典)이 없어 쓸쓸해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해당하는 수령(守令)에 결원이 생기게 되면 우선 제수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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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성(安城). 자는 대년(大年). 아버지는 안성군의 호장(戶長)으로 경군(京軍)이 된 이중선(李仲宣)이다. 고려 16대 국왕 예종의 측근 세력인 한안인의 매서(妹壻)이다. 아버지 이중선이 죽은 뒤 영업전(永業田)을 물려받아 서리(胥吏)가 되고자 했으나 정조주사(政曹主事)가 허락하지 않자 숙종 때 과거에 응시, 급제하였다. 직사관, 지경산부(知京山府)를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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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진도 입도조. 기축옥사는 동인과 서인의 당쟁으로 정여립(鄭汝立)[1544~1589]의 모반을 조작해 동인(東人)들을 숙청했던 사건이다. 이때 동인계의 실권 배후 인물이 광산이씨 이발(李潑)[1544~1589]이었기때문에 그의 형제와 어머니와 아들 등 삼족이 죽임을 당하는 참화를 입었다. 본관은 광산. 아버지는 이길(李洁)이다. 이길은 1589년의 기축옥사로 형인 이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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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초산군수(楚山郡守)를 지낸 진도 출신의 관리. 본관은 전주. 호는 송은(松隱). 아버지는 이광춘이고 어머니는 진주소씨이다. 진도군 임회면 송월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창녕조씨 조경식의 딸이다. 아들은 이동민(李東珉)·이동백(李東白)이다. 1842년(현종 8)에 태어나 주사로 출발해 초산군수를 지내고 1920년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송월에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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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진도 출신의 의병. 1875년 진도군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었고, 또한 군대도 해산되었다. 이에 이일근은 1908년 9월 1일 윤수봉(尹水封)과 함께 전라남도 장성군에서 김율(金聿)의 진에 들어가서 의병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영광군, 영암군에서 정찰, 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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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명(子明), 호는 연계(蓮溪). 효령대군 이보(李𥙷)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공조판서 이중경(李重庚)이다. 용력이 뛰어나고 병서에 정통하였다. 1743년(영조 19) 사리평(沙里坪)에서 무술 연습을 할 때 그 실력을 인정받아 영조에게 표범 모피를 하사받기도 하였으며, 활 쏘는 솜씨가 출중하여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모화관(慕華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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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부터 1896년까지 제295대 진도군수를 지낸 조선 말기의 관리. 아버지는 이정우(李庭羽)이다. 형으로 이경·이정·이벽이 있다. 1886년 교섭아문주사와 내무주사를 지냈다. 1889년 11월 12일자로 조일통어장정(朝日通漁章程)이 조인되어 제주도 해역에서 일본 어선들의 조업이 가능해지자 제주 도민들이 소요를 일으켰다. 이때 내무주사로 있던 이전(李琠)을 순심사(巡審使)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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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진도로 유배된 상궁. 상궁 이정민(李貞敏)은 1643년(인조 21) 7월 인조의 총애를 받던 조귀인(趙貴人)을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유배되었다. 상궁 이씨가 여종 애향(愛香) 등과 함께 모의하여 조귀인(趙貴人)을 해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조귀인(趙貴人) 스스로 저주 사건을 꾸며내어 상궁 이씨를 모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한다. 유배된 이정민은 같은 죄목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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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주지(胄之), 호는 망헌(忘軒). 좌의정 이원(李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이증(李增)이고, 아버지는 현감 이평(李評)이며, 처는 전주(全州) 이해(李偕)의 딸이고, 어머니는 허추(許樞)의 딸이다. 형으로 이윤(李胤)이 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68년(세조 14)에 태어났다. 문과 급제 후 검열, 정언 등 주로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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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진도군수를 지낸 문신. 1587년부터 1588년까지 제84대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 경주판관(慶州判官)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진도군수에 제수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587년 다시 제수되었다. 1588년(선조 21) 3월 전라감사가 진도군수 이즙의 병이 위중하니 파출(罷黜)하라는 서장(書狀)을 올렸고, 이에 이즙은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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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활약한 무신. 본관은 경주. 진도군 진도읍 매향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희백(李希白)이고 어머니는 광산김씨이다. 할아버지는 병사(兵使) 이시원(李時元)이다. 부인은 최씨이며 아들은 이성재(李聖梓)이다. 무예가 남달라 1570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장(召募將)으로 같은 마을의 김수생(金水生) 등과 더불어 이순신 막하에서 많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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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진도군수를 역임한 관리. 1794년(정조 18)에서 1795년(정조 19)까지 제225대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 이춘보가 진도군수로 활동한 내용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가 재임한 시기에는 진도를 비롯한 강진 등지에서 100년 만에 처음이라는 최악의 흉작이 들었다. 진도 군민들은 흉년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었고,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위유사·암행어사 등이 진도의 상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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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삼(子三), 호는 삼산(三山). 이색(李穡)의 후손이며, 이정기(李廷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행(李荇)이고, 아버지는 참봉 이병철(李秉哲)이다. 어머니는 박태상(朴泰尙)의 딸이고, 아내는 안동(安東) 권감(權瑊)의 딸이다. 아들로는 이득영(李得永), 형제로는 형 이화중(李華重)과 동생 이기중(李箕重), 이형중(李衡重), 이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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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사원(士元). 아버지는 창선대부(彰善大夫) 이순인(李純仁)이다. 형제로는 형 이정형(李鼎亨), 동생 이익형(李益亨)이 있다. 1626년(광해 8)에 태어나 1646년(인조 24)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53년(효종 4) 선전관 15년 만기를 채우고 6품으로 올랐다. 이듬해인 1654년(효종 5) 10월부터 1656까지 제128대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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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부터 1813년까지 제237대 진도군수를 지낸 조선 후기의 관리. 진도군수 재임 중이던 1813년(순조 13)에 전라도 암행어사 홍대호(洪大浩)가 백성들을 잘못 다스렸다는 암행 계(啓)를 올려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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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때 진도로 유배된 이시애의 딸. 이시애(李施愛)는 1467년(세조 13) 함경도민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이 실패한 후, 이시애는 참살되고 그와 관련된 자들은 유배되었다. 그 후 성종 때 이시애의 첩 막금의 아들 이장손(李將孫)과 딸 이흔비(李欣非)가 진도에 유배되었다. 이장손의 생활은 김화(金化)의 관노(官奴) 가구지(加仇之)가 책임지게 하였고, 이흔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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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부터 1894년 사이에 제293대 진도부사를 지낸 조선 말기의 관리. 진도군은 조존흥(趙存興)[1865~1868년 재임] 군수 때 진도도호부가 되었다가 백락현(白樂賢)[1872~1873년 재임] 부사 때 다시 진도군으로 강등되었다. 그런데 1889년 부임한 최병두(崔炳斗) 군수부터 다시 부사(府使) 발령을 했고 1895년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이희승은 군수가 아닌 부사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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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인지리 고인돌군은 두 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다. 가군 고인돌은 인지초등학교 뒤쪽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10여 기의 고인돌이 남북 1열로 군집을 이루고 있다. 나군 고인돌은 가군 고인돌에서 남동 방향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다. 1968년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에서 남해안 도서 지역을 대상으로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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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에 있었던 백제시대의 지명. 인진도군은 신라의 삼국 통일 후 757년(경덕왕 16) 진도현으로 개칭되어, 무안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백제시대에 인진도군의 치소는 고군면 고성리에 두었으며, 영현으로 도산현(徒山縣)과 매구리현(買仇里縣)을 거느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의 진도군 군명란에 인진도(因珍島)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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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인천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인지리에서 고야리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700m 정도 가다 보면 고개 정상부에 이르러, 길 우측에 ‘경주김씨(慶州金氏)’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고인돌은 이 묘역 안에서 1기가 확인되었다. 고인돌의 덮개돌 크기는 300×200×155㎝이며,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다. 장축방향은 동-서이며, 4개의 받침돌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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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조선 중기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난 뒤 남해안 지방에서 왜변이 빈발해지자, 조선 조정에서는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장악하는 비변사(備邊司)라는 합좌기관(合坐機關)을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선조 때의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 질시만 하고 있었다. 이와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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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일대의 고려·조선시대 행정구역. 백제 때는 매구리현(買仇里縣)이었다가 신라의 삼국통일 후 지방행정제도 개편으로 757년(경덕왕 16)에 첨탐현(瞻耽縣)으로 개칭되면서 뇌산군(牢山郡)[嘉興縣]의 영현이 되었다. 첨탐현(瞻耽縣)은 고려 전기인 940년(태조 23)에 임회현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018년(현종 9) 임회현은 폐현되어 진도현에 합해졌다.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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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삼별초의 항쟁 때 죽은 왕온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고분. 전 왕온의 묘에는 진도에서 있었던 삼별초 항쟁과 관련된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오고 있다. “옛날 삼별초 항쟁 때 왕이 몽고군에게 쫓겨서 왕무덤재까지 왔는데 지금의 논수골에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격전 중에 싸움을 피해 다녔던 왕온은 몽고장수 홍다구에 의해 사로잡혔다. 왕온을 살리려고 덤볐던 왕온의 아들 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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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승려. 1198년(신종 원년)에 진도군 의신면에 있는 쌍계사 정수암을 건립하였다. 정달선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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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진도로 유배된 학자.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경(大卿), 호는 무정(茂亭)이다. 서울 출신이고 아버지는 정기우(鄭基雨), 할아버지는 정윤용(鄭允容), 증조부는 정동일(鄭東逸)이다. 아들로 정인형(鄭寅衡)이 있다. 강위(姜瑋)의 문하에서 수학해 문학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1858년(철종 9)에 태어났다. 문과 급제 후 예조참의, 승지, 내부참의, 규장각부제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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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위도(衛道), 호는 송죽당(松竹堂). 1606년(선조 39)에 진사가 되고 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간원정언·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1612년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몰아냈던 대북파의 영수 이이첨으로부터 박승종(朴承宗)과 유희분(柳希奮)의 무리라 하여 미움을 받았다. 1616년(광해 8) 이이첨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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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압해(押海). 호는 묵제(墨霽). 해남에서 진도 금호도로 건너온 정태영(丁太塋)[1713~?]의 손자이다. 금호도에 관해정(觀海亭)을 짓고 서당을 열어 해남, 진도 등지에서 22명의 수학자가 몰려들었다. 제자들이 학계를 구성해 묵제사(黙霽祠)를 짓고 제사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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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진도로 유배된 문신.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길보(吉甫), 호는 구계(癯溪), 동촌(東村)이다. 정지겸(鄭之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환(鄭晥)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정뇌경(鄭雷卿)이다. 아내는 전주 사람 이시해(李時楷)의 딸이고, 어머니는 윤상형(尹商衡)의 딸이다. 아들로 정사효(鄭思孝), 손자로 정도형(鄭道亨)이 있다. 1632년(인조 10)에 태어났다. 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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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 정자마을 앞 250m 가량 떨어진 중매산 아래에 있는 몰무덤재라 불리는 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예전에는 그 고개에 말무덤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밭으로 개간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진도군 문화유적 조사시 처음 발견된 유적으로 1987년 학계에 보고되었다. 정자리 유물산포지에서 수습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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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진도에 유배된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익지(翼之), 호는 휴옹(休翁)·휴헌(休軒)·휴암(休菴)이다. 한성참군(漢城參軍) 정수후(鄭守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린수(鄭麟壽)이고, 아버지는 시정(寺正) 정사신(鄭思愼)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사직 안혼(安混)의 딸이다. 아내는 이혼(李渾)의 딸이다. 1571년(선조 4)에 태어났다. 문과 급제 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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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진도군수를 역임한 관리. 1730년 4월 16일부터 1732년 11월까지 제178대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 1706년(숙종 32) 가배량 만호(萬戶)로 제수되었다. 1713년(숙종 39)에 훈련주부(訓鍊主簿)·도총도사(都摠都事)를 지내고 이듬해에 경상우수우후(慶尙右水虞侯)를 지냈다. 1731년(영조 7) 전라감사 이수항(李壽沆)이 진도군수 조덕기가 곤궁한 백성을 잘 구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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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신육리에 설치된 조선 후기의 군사시설. 조도관방은 하조도관방을 이르는 것으로 상조도 맹성관방과 함께 설치되었다. 맹성관방과 같은 해에 별장진이 설치되었다면 그 시기는 1708년(숙종 34)이 될 것이다. 하조도 신육리 읍구마을에 그 성 흔적이 있다. 이 관방과 관련이 있었을 만한 봉수지로 신금산 돈대와 돈대봉 돈대터가 있다. 신육리에는 진막(鎭幕)구미라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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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덕여(德汝), 호는 일곡(日谷). 시호는 문충(文忠). 조진명(趙鎭明)의 아들이다. 1789년 춘당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795년 경기도 도사, 1801년(순조 1) 이조참의, 1806년 형조참판을 두루 역임하였다. 1808년에는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도망간 친척의 조세를 대신 내는 족징이 심하다는 암행어사 서능보의 보고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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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정유재란에서 전사한 무신. 본관은 창녕. 아버지는 조응량(曺應亮)이다. 부인은 비인최씨이고 아들은 조익온(曺益溫)이다. 관직이 참봉(參奉)에 이르렀다. 정유재란 때 아버지를 따라 명량대첩에 참가하였다가 아버지의 배가 뒤집혀 침몰하는 것을 목격하고 적선에 뛰어들어 격전을 벌이다 함께 순절하였다. 전남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 산117-3외에 소재한 진도정유재란순절묘역(珍島丁酉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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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진도 출신의 무신. 본관은 창녕. 임진왜란 시 선무원종공신 조응량(曺應亮)의 동생 조응설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조성업(曺誠業)이고, 어머니는 경주박씨이다. 부인은 현풍곽씨이다. 무과 시험에 합격하여 군관을 역임하였다. 진도군 지산면 고야평(古野坪)에 파손되어 방치되어 있던 제방을 사재로 인력을 동원, 보수하였다. 이에 고야평의 농토가 옥토가 되어 군민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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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창녕. 창녕조씨 진도 입도조 조희직의 8세손이다. 아버지는 조한진(曺漢晋)이다. 1437년(세종 19) 진도 설군 때 4촌 조복명과 함께 공을 세웠다. 조복리의 조카 조섭주(曺燮周)는 당시 두기관(頭記官)이었다. 1933년 향현사를 재건하였을 때 박근무(朴根茂)·하극창(河克昌)·임은·박의경(朴義敬)·최민명(崔閔命)·김백균(金百鈞) 등 6명과 함께 추배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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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창녕. 고려 후기 정언(正言)으로 신돈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진도 가흥현 호장(戶長)으로 좌천되었고, 조선왕조 개창 후에는 이군불사(二君不事)를 고수하여 창녕조씨의 진도 입도조가 된 조희직(曺希直)의 후손이다.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관직이 참군(參軍, 정7품)에 이르렀다. 1437년(세종 19) 해진군에 속해있던 진도를 군(郡)으로 분리·독립했을 때,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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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사극(士克), 호는 퇴수재(退修齋). 조박(趙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견소(趙見素)이고, 아버지는 감역 조시채(趙始采)이다. 어머니는 최득일(崔得一)의 딸이다. 아내는 변세구(邊世耉)의 딸이다. 형으로 조성집(趙聖集)이 있다. 1681년(숙종 7) 태어났다. 문과 급제 후 지평, 정언, 장령, 헌납 등을 지내다 1723(경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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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임진왜란 시 순절한 무신. 본관은 창녕. 창녕조씨 진도 입도조 조희직(曺希直)의 12세손이고 진도 창군에 공이 컸던 조복명(曺復明)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조상겸(曺尙謙)이고 어머니는 남양이씨로 셋째 아들이다. 아들은 조유남(曺裕男)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으로 있던 중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순절하였다. 진도군 진도읍 성죽동(城竹洞)에 있는 조수의의 부친 조상겸의 묘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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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1476년(성종 7) 병조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서산군수(瑞山郡守)로 재임하던 중 1489년(성종 20) 11월 송사를 태만히 하고 청렴하지 못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도총부 경력(經歷), 훈련원 부정(副正) 등으로 승진하였다. 1494년부터 1495년까지 제26대 진도군수를 지냈다. 진도군수 재임 시인 1494년(성종 25)에 왜구들이 진도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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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동학농민운동 시 진도의 수성군 대장. 남외파 조경직(曺擎稷)의 둘째 아들로, 자식 없이 죽었다. 동학이 진도에 포교되기는 1892년 1월 나주 사람 나치현이 진도군 의신면 도목리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 1892년 4월 27일 동학군에 의해 전주감영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진도군수 이희승은 종적을 감추고 인심이 흉흉해졌다. 진도군의 보수적인 유생과 서리를 중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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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정유재란 때에 공을 세운 무신. 조응량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와중에서 이순신을 돕다가 명량해전에서 부자가 함께 순절한 선무원종공신이다. 본관은 창녕. 진도 입도조 조희직(曺希直)의 13세손이다. 아버지는 조찬상(曺纘商), 어머니는 경주이씨이다. 임진왜란 순절자 조수의(曺守義)의 종질이다. 5남 중 넷째이다. 부인은 김해김씨이며 아들은 조명신(曺命新)이다. 진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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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바둑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며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해 오룡(五龍) 집안이라 불렸다. 그의 아들 5형제 집안은 전라남도의 명문가를 이루었다. 본관은 창녕. 창녕조씨 시조 조계룡(繼龍)의 25세손이며 진도 입도조 조희직의 증조부이다. 고려 후기에 시중을 지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오룡동으로 내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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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무신. 1866년(고종 3) 서양 세력들이 조선을 침범하기 시작하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은 진도군이 남해의 요해지라 하여 군(郡)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정삼품 당상관의 부사(府使)를 배치하였다. 진도부사는 유사시에 영광·함평·영암·해남 등 4개 군현의 군수, 임자·지도·다경·목포·어란·미진·마량 등의 수군만호, 진도 안에 있던 금갑·남도 등 9개 수군만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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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무신. 고려말 진도 입도조 조희직(曺希直)의 13세손이다. 아버지는 조계상(曺繼商)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3남 중 장남으로 진도군 군내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김해김씨이며 아들은 네 명이다. 임진왜란 때에 왜적을 많이 참획하였다. 그 공을 높이 평가한 이순신이 건의하여 사헌부 장령(掌令)이라는 관직이 특별히 내려졌다. 정유재란이 발발한 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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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이다. 조존성(趙存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이고, 아버지는 괴산군수 조희석(趙禧錫)이다. 어머니는 백홍일(白弘一)의 딸이다. 조태구(趙泰耉)의 종제이며, 조태억(趙泰億)의 종형이다. 1660년(현종 1)에 태어났다. 1686년(숙종 12) 별시문과에 종형 조태구와 함께 병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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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시조 조계룡의 28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조정통(曺精通), 할아버지는 조한용(曺漢龍), 아버지는 조경숙(曺景淑)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는 사촌 동서 간이다. 부인은 강윤충(康允忠)의 딸이며, 아들 조근(曺謹)과 조심(曺諶)을 두었다. 조희직은 1366년(공민왕 15) 정언(正言, 종6품) 재임 중 정추(鄭樞)·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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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실 종기약을 개발한 조선 말기의 한의사. 본관은 신안. 호는 수계당(壽溪堂). 신안주씨 진도 입도조는 주수(朱壽)이고, 임회면 구분실리 입도조는 그의 둘째아들 주번(朱藩)이다. 주경신은 주번의 11세손이며, 1863년에 진도군 임회면 구분실리에서 태어났다. 주경신은 진도에서 살기가 어려워 타관에 나가 품을 팔다가 명의를 만나 종기에 잘 듣는 고약 비법을 익혀 고향에 돌아와 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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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죽림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죽림초등학교 정문 앞에 2기의 고인돌이 있다.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에 의하여 새로 발견되었다. 덮개돌이 도로공사로 인해 거의 매몰되거나 이동이 이루어져 확실한 형식을 알 수 없다. 또한 받침돌의 유무도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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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중굴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중굴리에서 하굴리로 향하는 농로를 따라 150m 정도 가면 왼쪽에 고인돌 1기가 있고, 오른쪽에 2기의 고인돌이 있다.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때 발견, 조사되었다. 고인돌 아래쪽이 잡석 등으로 매몰되어 받침돌 등을 확인하기 어려웠으나, 대형 고인돌 1기에서 받침돌 여섯 개가 덮개돌을 받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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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중굴리에 있는 선돌. 중굴리에서 하굴리로 가는 도중 농로 오른쪽 중굴 고인돌군과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다. 선돌의 크기는 100×50×40㎝이다. 선돌은 삼막봉(251m) 북쪽의 경사면에 위치하며,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선돌은 밭둑을 표시하기 위해 돌담을 쌓는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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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중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가군 고인돌은 논밭 사이에 원형으로 군집되어 있고, 나군 고인돌은 중리 마을에 있다. 다군 고인돌은 낮은 구릉상에 13기가 군집해 있다. 중리 고인돌군은 세 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다. 가군 고인돌은 중리 마을에서 북서-남동 방향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계단식 논밭 사이에 원형으로 군집을 이루고 있다. 나군 고인돌은 원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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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옥대리 중리마을에 있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유물산포지. 중리마을에는 두 곳의 유물산포지가 있다. 의신면 돈지리에서 청룡리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옥대마을을 지나 중리마을로 들어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중리마을 뒤쪽으로 가는 농로를 따라가다 보면 길 우측으로 유물산포지①이 위치한다. 이곳은 강성봉[204m]의 남동쪽 능선에 해당하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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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중만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송정리에서 상만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 100m 정도 가면 길 왼쪽 밭에 3기의 고인돌이 있다.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에 의하여 발견, 조사되었다. 덮개돌이 이동되거나 지표 아래에 매몰되어 있어 확실한 형식을 알 수 없다. 배열 상태는 일정하지 않으며, 덮개돌의 방향은 동서 방향이다. 고인돌의 전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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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 중만마을에 있는 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 귀성리에서 서쪽 도로를 따라 1.5㎞ 정도 가면 중만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에 두 곳의 유물산포지가 있다. 이 마을 새마을회관 앞 경작지가 유물산포지①이고, 유물산포지① 남쪽으로는 ‘개넘어골’이 있다. 송정리에서 상만리로 가는 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다 보면, 중만마을에 진입하기 앞서 길 왼쪽으로 밭이 펼쳐져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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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지막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지막리 고인돌군은 3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다. 가군 고인돌은 지막리 서남단에 원래 6기가 있었으나 2기는 파괴되어 4기가 남아 있다. 나군 고인돌은 박연배씨 집과 박필현씨 담장에 10기가 있으며, 다군 고인돌은 지막리에서 벌포리 쪽으로 가다가 보면 오른쪽으로 밀양박씨 세장산비가 있는데, 13기의 고인돌이 민묘 주위와 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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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지막리에 있는 선돌. 마을 주민들은 예로부터 마을에 선돌을 세워두면 잡귀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믿어 선돌을 세웠다. 고군면 소재지에서 지방도 801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지막리에 이르게 된다. 고군면 지막리 선돌은 마을회관에서 동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마을길 양옆에 2기가 위치하고 있다. 크기는 1호가 116x×70x22㎝이며, 2호가 90x×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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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선사시대의 돌무덤. 지석묘는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는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으로, 또는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기념물)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지석묘는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른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지석묘,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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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 1378년 전라도도순문사로 장흥부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1388년에는 요동(遼東) 정벌에 안주도부원수로 참가했다가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편을 들어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9년(공양왕 1)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중흥공신녹권(中興功臣錄券)을 받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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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수군진(陣). 금갑진성은 조선시대 남해와 서해를 잇는 주요 해상교통로에 위치하였으며, 왜구를 막는 전략상의 요충지로 조선 수군만호가 지휘하는 수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성벽은 돌로 쌓은 석성이며, 축조된 시기는 1485년에서 1499년 사이로 추정된다. 현재 잔존하고 있는 성곽은 성의 서측부와 북측부이다. 금갑진이 위치한 진도는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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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동거차도리 일대의 구상(球狀) 페페라이트. 진도 동거차도 구상 페페라이트는 규질[암석의 구성 성분 중 규산의 함유율이 63% 이상인 경우] 구상의 페페라이트와 섬 일대에 분포하는 유문암질 응회암으로 인해 학술적·교육적 가치가 높으며 세계적으로도 야외에서 대규모로 산출되는 경우가 드물어 희소성이 높은 지형 지질 경관 자원이다. 지구 과학 기념물로서 가치가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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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 1270년 (원종 11) 배중손과 노영희 등이 몽고에 굴복한 고려 정부에 반발하여 삼별초와 그 지지자들을 이끌고 강화도에서 진도로 내려와 이곳에서 부서(部署)를 정하고 관부(官府)를 열었으며, 궁궐과 성곽을 쌓고 몽고 침략자와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들어 승화후 온(承和侯溫)을 왕으로 추대하여 왕실과 대립되는 정권을 세웠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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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진도 남도진성의 남문 밖에 세워진 2개의 다리. 쌍운교와 단운교는 진도 남도진성의 남문 밖을 흐르는 개울인 세운천을 건너는 2개의 무지개다리이다. 진도 남도진성은 고려 원종[재위 1259~1274] 삼별초가 진도에서 몽고와 항쟁을 벌일 때 해안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제주도로 옮겨갈 때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쌍운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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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진도에 설치된 도호부. 조선은 1413년(태종 13)에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종래 각 도의 단부관(單府官)을 도호부로 고치고 종3품의 도호부사를 두었다. 1415년에는 군 가운데 1,000호 이상인 것은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본래 중국에서는 군사적인 성격이 강하여 주로 변경에 설치되었으나 고려·조선시대에는 전국에 분포되어 있었다. 도호부의 수는 후기에 갈수록 증가해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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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에 있는 산성. 초축시기는『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고려 말 삼별초의 진도 진입 시에 왕온이 쌓은 것으로 밝히고 있으나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통일신라의 유물이 주를 이루고 있어 이 시기에 산성이 가장 활발하게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 삼별초와 정유재란 당시의 명량대첩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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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진도군이 진도부로 승격되면서 설치된 진관(鎭管). 조선시대 군제는 무관 지휘의 육군인 병마절도사와 수군인 수군절도사가 있고 그 휘하에 첨절제사진, 만호진 등 조직이 있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각 고을의 문관 수령도 주(州)의 목사나 부(府)의 부사가 그보다 직급이 낮은 고을의 군수를 거느리고 전쟁에 임하는 편제로 운영되었다. 조선 중기까지도 진도군은 장흥부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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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진도군의 관부(官府)와 민거(民居)를 둘러서 쌓은 성. 1437년 해진군(海珍郡)에서 분리되어 독립한 진도군은 3년간 고읍성을 치소로 삼고 있었다. 진도읍성은 1440년(세종 22) 진도고읍성에서 현재의 진도읍으로 진도군의 터전을 옮기면서 축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치소(읍성)의 입지 조건으로는 바다와 가까운 요해지로서 백성들의 생업을 편안히 하고 방어하기에 편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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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정유재란 때 순절한 진도 군민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 정유재란은 진도 울돌목을 중심으로 수군전이 치러진 전쟁이었다. 1597년 9월 15일 진도 벽파진에 도착한 이순신은 9월 16일 명량해협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곧바로 신안 당사도로 후퇴했기 때문에 진도는 상륙한 일본군에 의해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당시 진도 관군은 군수인 송덕일(宋德馹)이 이끌었고,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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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에 있는 조선 후기 철비. 1684년(숙종 10) 칠전리 주민들은 서당인 노암재(露岩齋)를 세우고 학계(學契)를 결정했는데, 1714년(숙종 40)에 학계 운영에 관한 사항을 기록해 두기 위해 철비를 건립하였다.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 173번지에 있다. 높이 1.4m, 너비 47.5㎝, 두께 6.5㎝이다. 상단은 화문으로 관머리 형태를 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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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의 통일신라시대 때의 행정구역 이름. 백제 때의 인진도군에서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진도현으로 개칭되었다. 인진도군에서 진도현이 된 후 무안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에 진도현은 나주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144년(인조 21)에 현령이 파견됨으로써 승격·독립하였다. 또한 군에서 현으로 강등된 가흥현(嘉興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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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진도군수를 지낸 관리. 1461년(세조 7)부터 1464년(세조 10)까지 제12대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 1464년(세조 10) 진도군수 재직 시 진상은 임금님께 올릴 진상품으로 바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뭍에 나가 사냥을 하고 돌아가다 태풍을 만나 배가 부서져 24명이 숨진 일이 있었다. 사헌부의 탄핵으로 진상(陳祥)은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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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창유리에 있는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 하조도 창유리 유토마을 내 정자나무 아래에 있다. 원 위치는 읍구리 쪽으로 30m 떨어진 밭 가운데에 있었던 것을 풍수지리설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 놓았다 한다.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창유리 선돌의 크기는 높이 235㎝, 폭 48㎝, 두께 3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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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유생. 1696년(숙종 22) 7월 21일 방찬(方燦) 등이 장형(張炯)의 묘에 목인(木人)을 묻어 서인을 모해하려 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동궁(東宮, 후일의 경종)에게 불리하다 여긴 채제윤(蔡悌胤)은 강오장(姜五章)과 윤종서(尹宗緖)에게 그 부당함을 상소하기를 권하였다. 소초는 윤종서가 짓고 강오장은 상소문을 썼다. 이 사건은 역적 방찬에 윤종서가 연루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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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동외리와 군내면 월가리의 경계를 이루는 철마산에 있는 산성. 진도읍의 진산(鎭山)은 본래 북산(北山) 또는 망적산(望敵山)이지만, 주민들은 철마산이라 한다. 이 산에서 고을 수령이 매년 정한 날짜에 철마신상(神像)을 모시고 제사 지내던 마조단(馬祖壇)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철마산성은 그 성의 규모나 중앙단으로 보아 마조단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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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정유재란 때 명량해협에 철환을 가설한 곳. 1956년 진도교육청 교육감이었던 곽충표는 벽파진에 이충무공 전첩비를 건립할 때 녹진등대 옆에(현 진도대교 밑)에 ‘정유재란 철환가설지’라는 표지석을 세웠다. 정유재란 시 명량해전에서 순절한 조응량(曺應亮)[?~1597]의 표충비에 명량해협에 철환(鐵環) 또는 철쇄(鐵鎖)를 매설해 놓고 왜선을 유인해 대승을 거뒀다는 내용에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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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과 고군면에 있는 첨찰산에 세워진 조선시대의 봉수. 첨찰산 봉수는 해남 관두산 봉수(현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성좌동 관두산)로부터 여귀산 봉수(현 임회면 죽림리 여귀산)로 전달된 봉홧불을 해남 황원 봉수(현 해남군 화원면 장춘리·문내면 고당리의 접경 日星山)에 중계하는 연변봉수(沿邊烽燧)의 하나로 건립되었다. 대략 조선 초기 진도군의 행정체계가 재정비되는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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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과 고군면 경계에 있는 석성. 첨찰산성은 진도군 의신면과 고군면의 경계지인 진도군에서 가장 높은 산인 첨찰산[해발 485m]에 위치해 있다. 첨찰산 정상 봉수대가 위치한 산정을 중심으로 동남쪽의 해발 460m 고지와 남쪽 420m 고지를 연결한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1500년도 더 된 백제 때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산성을 쌓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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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에 있었던 통일신라시대의 지명. 첨탐(瞻眈)이라는 뜻은 제주도가 바라보이는 땅이란 뜻으로 추측된다. 강진군의 마량 일대에 있던 고을 이름 중 탐진(耽津)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는 탐라국(제주도)을 건너다니던 나루터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었다. 삼국시대 백제의 매구리현(買仇里縣)인데, 신라의 삼국 통일 후 지방 관제 개편으로 757년(경덕왕 16) 첨탐현(瞻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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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 마한의 54소국(小國) 중 한 나라.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 한조(韓條)에는 우리나라 고대 삼한의 여러 소국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나라 이름은 당시의 중국 상고음(上古音)에 따라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 고대의 북방음은 현행 우리 한자음에 가까우므로 이들 나라의 위치 비정에 많은 도움이 된다. 초산도비리국의 ‘초(楚)’는 중국 고대음이 ‘tsi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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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8년부터 1440년까지 제2대 진도군수를 지낸 조선 전기의 문신. 초대 군수 양경(梁瓊)의 뒤를 이어 부임한 최기는 전임 군수가 시작한 읍성 축조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준공은 보지 못한 채 1440년 3월 초에 진도를 떠났다. 진도읍성 공사는 같은 해인 1440년(세종 22) 3대 진도군수로 부임한 이순전(李純全) 재임 시에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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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년 약 6개월 간 제61대 진도군수를 지낸 조선 중기의 관리. 1555년(명종 10) 달량포(達梁浦)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당시 진도군수였던 최린은 왜구가 경내에 들어오기도 전에 아속(衙屬)을 거느리고 진(鎭)을 버리고 도망갔다. 고을 백성들이 따라 피해서 온 진이 비어 버리게 되었고 군민들은 격분하였다. 수사(水使)의 명에 따라 최린은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나왔으나 이미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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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칠전리에서 돈지리 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곳의 계단식 논둑에 모두 6기가 위치하고 있다. 1979년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에서 처음 조사되었으며, 그 후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때 다시 조사되었다. 덮개돌이 이동되거나 매몰되어 확실한 형식을 알 수 없지만 1기에서 받침돌이 확인되어 기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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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에 있는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 중굴마을에서 하굴마을로 향하는 농로 우측에 중굴 고인돌군과 약 5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삼막봉(251m)의 북쪽 사면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1979년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시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그 후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재조사하였다. 칠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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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 칠전마을에 있는 철기시대에서 고려시대의 유물산포지. 의신면 칠전리에서 진도읍 쪽으로 1㎞ 정도 가다 보면 도로 왼쪽에 칠전마을 진입로가 나온다. 유적은 진입로의 오른쪽에 형성되어 있는 구릉상에 위치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회청색경질토기편과 도기편 등이 있다. 유물산포지는 대부분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유적 내에는 칠전 고인돌군③이 포함되어 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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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돈지리에서 의신초등학교를 지나 침계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 600m 정도 가면 도로 우측으로 ‘앞들’이라는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 평야 사이를 가로지르는 의신천과 인접하여 고인돌이 위치한다. 1979년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에서 처음으로 조사하였고, 그 후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시 재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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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흙(점토)을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 구석기시대에는 주로 석기만 사용하고 토기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토기의 출현은 신석기시대부터이다. 이는 구석기시대의 수렵, 채집생활이 신석기시대에 와서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착생활로 전환되면서 식량을 저장하고, 음식을 끓이고, 식수를 담아두는 용기가 필요하게 되면서 출현하였다. 처음에는 자연적인 구덩이나 풀로 만든 바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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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팽목리 팽목마을에 있는 유물산포지. 진도군 임회면 서망마을에서 상연동으로 가다보면 팽목마을에 이른다. 유적은 이 마을의 동북쪽에 있는 ‘집건너들’이라는 계단식 밭에 위치한다. 이곳은 북쪽으로 흐르는 한복산 지맥의 서쪽 사면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 유물산포지에서는 선사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그물추와 자연유가 흐르는 도기편,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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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포산리 포산마을에 있는 철기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유물산포지. 포산 유물산포지①은 포산마을 동북쪽에 형성된 대통뫼[109m]의 남서쪽 산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의 남서쪽으로 100m 지점에 포산마을이 위치하고 있으며, 북서쪽 가장자리에는 포산삼거리가 있다. 포산 유물산포지②는 진도읍에서 국도 18호선을 타고 남서쪽으로 남천 3교를 지나면 고막뫼라고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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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표류하여 어떤 곳에 닿는 것. 여기서의 표착은 외국인이 국내에 표류된 경우를 일컫는다. 외국인의 국내 표착 신고와 관리는 어느 때나 연안 고을과 수군의 주요 임무였다. 특히 진도 해역은 중국~일본 간 해로 상 중간 지점에 있어 비교적 표착 기록이 많다. 그 처리를 잘못해 진도군수가 징계를 받은 일도 있었다. 진도에 표착한 외국인은 주로 중국인, 일본인, 유구인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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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하굴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중굴리에서 하굴리로 가는 농로 오른쪽의 박동열 씨 밭에 1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현재는 유실되어 확인할 수 없다. 기존 조사내용에 따르면 덮개돌은 타원형이고, 장축방향은 동서 방향이다. 크기는 650×440×170㎝이며, 여섯 개의 받침돌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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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원포리 하율마을에 있는 시대 미상의 고분. 고군면 소재지에서 지방도 801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하율마을에 이르게 된다. 고분은 하율마을에서 남쪽으로 60m 정도 떨어져 있는 야트막한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주변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지만 고분이 위치하고 있던 자리는 수풀만 무성하다. 마을사람은 이곳을 ‘말무덤’ 또는 ‘장터’라고 부르고 있으나 고분의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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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하율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하율리 마을 안에 1기의 고인돌이 있다. 남동쪽으로는 말무덤이 있으며 왼쪽으로 민가가 밀집해 있다.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에 의하여 발견, 조사되었다. 고인돌은 덮개돌이 이동되고, 일부 파괴되어 확실한 형식을 알 수 없다. 고인돌의 규모는 길이 180㎝, 폭 100㎝, 두께 50㎝의 소형 고인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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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원포리 하율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유물산포지. 고군면 소재지에서 지방도 801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하율마을에 이르게 된다. 유물산포지는 하율마을에서 동쪽으로 50m 정도 떨어져 있는 야트막한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다. 유물은 기와편, 자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현재 주변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마을사람들로부터 ‘터들’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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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진도에 유배된 문신. 자는 국이(國耳). 할아버지는 중추부경력(中樞府經歷)을 지낸 허진(許震)이다. 생원으로 성균관에 들어간 뒤 1615년(광해군 7)에 진사 정택뢰(鄭澤雷) 등 19인과 함께 이원익(李元翼)의 무죄를 호소하는 연명 상소에 참여하였다.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 여론이 나돌자,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 등에게 “대비를 폐하면 인심을 잃을 것이니 대비를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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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호구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 광석초등학교 앞 삼거리에서 호구리 광구리 쪽으로 10기의 고인돌이 남-북 1열로 배치되어 있다. 1968년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에서 남해안 도서 지역의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함으로써 처음 학계에 알려졌다. 그 후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재조사되었다. 고인돌 2기에서 받침돌이 확인된 것으로 보아 전체적으로 기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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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원종·충렬왕 때의 부원(附元) 분자. 본관은 남양. 본명은 홍준기(洪俊奇)이며 홍다구(洪茶丘)는 아명(兒名)이다. 몽고명은 찰구이(察球爾)로, 원나라에서 태어나 자랐다. 할아버지는 1218년(고종 5) 몽골에 투항한 홍대순(洪大純)이며, 아버지는 몽골 침입의 길잡이 노릇을 한 홍복원(洪福源)이다. 원나라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세조가 그를 다구라고 불렀다고 한다. 12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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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7년부터 1499년까지 제28대 진도군수를 지낸 조선 중기의 관리. 신천군수, 진도군수, 도총부 도사(都事), 경력(經歷), 경상도 병마우후(兵馬虞候), 거창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진도군수로 재임 중인 1499년(연산 5) 군사 430여 명을 거느리고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사냥을 하다가 왜구를 만나서 군사 3명은 화살에 맞아 죽고, 3명은 칼날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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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5년부터 1726년까지 제174대 진도군수를 지낸 조선 후기의 관리. 진도군수 재임 중인 1726년(영조 2)에 사간원 정언(正言) 유겸명(柳謙明)으로부터 흉년의 곡물(穀物)을 횡령하여 군민을 굶주리게 하였다는 탄핵을 받았다. 영조는 풍문은 믿을 것이 못되니 다시 조사하라 지시하였다. 후에 영부사(領府事) 민진원(閔鎭遠)이 홍우귀의 치적이 볼 만한 것이 없으니 잡아다가 가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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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진도군수를 지낸 문신. 1564년~1565년까지 제66대 진도군수로 재임하였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은 1547년 진도로 유배되어 19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이때 황인록(黃仁祿)이 진도군수로 있었는데 치정(治政)도 보잘 것이 없었으면서 노수신에게 심한 박대를 가하고 불손하고 무례(無禮)하기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후일 노수신이 해배되어 중앙 관직에 등용되자,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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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 회동마을에 있는 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 군내면 소재지에서 의신면 방향으로 18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도로의 오른쪽에 회동마을이 위치한다. 유적은 마을에서 북쪽으로 1.2㎞ 정도 떨어져 있으며 가인봉(佳仁峰)[291.5m]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구릉의 말단부에 해당한다. 유물은 회청색경질, 적갈색경질토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유적의 서쪽에는 상수원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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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원나라의 무장(武將) 흔도(忻都)는 홀돈(忽敦)이라고도 한다. 1276년(충렬왕 2) 흔도의 아들과 안평공(安平公)의 딸이 결혼하였다. 1277년(충렬왕 3) 흔도의 아들 기(琪)가 수사공으로 임명되었다. 기는 안평공(安平公)의 딸과 결혼하였으므로 왕실의 예에 준하여 이 관직을 주었으며 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썼다. 고려 후기 삼별초 토벌과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