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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열녀. 본관은 순흥(順興). 남편은 김녕김씨(金寧金氏) 김경세(金景世)[?~1636]로 인조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주박(主薄)의 무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남한산성 방어군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였다. 김경세 처 순흥안씨는 병자호란으로 남편이 전장에 나가게 되자 당나라에서 나는 삼중으로 된 붉은 실로 남편의 옷섶을 꿰매어 표시를 하였다. 남편이 전쟁에서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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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백승(伯承). 아버지는 문천군수 김학민(金学敏)이다. 김병구(金秉九)[1809~1871]는 1840년(헌종 6) 성균진사에 장원급제하였다. 아버지가 여러 달 동안 병이 위중하여 입맛을 잃고 먹지 못하다가, 2월 한겨울 어느 날 살구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김병구는 살구를 구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에 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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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12세손이며, 판서 김유(金濡)의 10세손이다. 김창덕(金昌德)은 부모님이 병환이 나자 변을 맛보며 간병을 했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여 기운을 차리게 하였다. 인근에서 하늘이 낸 효자라며 칭송이 자자했다. 이에 군내 유림들이 감사에게 김창덕의 효행을 알리는 글을 여러 차례 올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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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양천산(凉泉山)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1932년에 간행된 『상산지(常山誌)』에 대운사 터를 고려시대 절이 있던 곳으로 추정하면서, 작은 암자와 목불, 그리고 석불이 남아 있는데, 이것들을 사람들이 수신과 기복의 목적으로 서로 보호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37년 간행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폐사된 사실은 기록하지 않고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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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와 백곡면 대문리 사이에 있는 신라시대 석축 산성. 만노산성(萬弩山城)은 문헌 기록에 만노성(萬弩城)·만뢰성(萬賴城)·이을성 등으로도 나타나는데, 현재는 만노산성 또는 만뢰산성으로 불린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표기된 바에 따라 이을산성이라 칭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만노산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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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열녀이자 효부. 본관은 알 수 없으며, 남편은 정효창(鄭孝昌)이다. 말즐비(末즐非)[끝비]는 남편 정효창이 수군으로 있다가 사망하자 6년 동안 한결같이 상복을 입고 슬퍼하면서, 음식을 갖추어 시어머니에게 올린 뒤 남편 제사를 지냈다. 1527년(중종 22)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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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여흥(驪興). 호는 낙진당(樂真堂), 평사(平沙). 민태중(閔泰重)은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1642년(인조 2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682년(숙종 8) 참봉 벼슬을 내렸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언제나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도덕을 실천하며 학문을 연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부모님 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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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시루봉에 있는 초기국가시대에서 일제강점기 절터. 백련암 터는 본디 길상사의 옛터로서, 일제강점기 백련암(白蓮庵)이란 작은 암자가 들어섰다가 이 암자도 없어지면서 빈터로 남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는 길상사가 태령산(胎靈山)에 있는 사찰로 기록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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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영수사 영산회괘불탱(鎭川 靈水寺 靈山會掛佛幀)」은 본래 진천읍 상계리에 있던 백련암(白蓮庵)에서 1653년(효종 4)에 제작되었다가 백련암이 폐사되면서 지금의 영수사로 옮겨 왔다. 초파일 등의 중요한 행사 때 절 마당에 걸어 두고 많은 신도들이 한꺼번에 예불할 수 있도록 사용한다. 진천 지역 유일한 조선시대의 괘불탱으로 삼베에 채색으로 그렸으며 길이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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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무신이자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 상산백(常山伯) 송인(宋仁)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송소(宋玿)이다. 송광도(宋匡度)는 정용낭장(精勇郎將)을 지냈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따르면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어찌나 지극했던지 중국 황제에게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정려는 본래 진천군 산정촌의 묘 아래 있었으나 1636년(인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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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 영수사는 918년(태조 1년)에 증통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나 확실한 문헌 기록이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절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조선 말기인 1871년(고종 8)에 간행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 처음으로 기록이 나타나는데 간단히 위치만 소개되어 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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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신정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 용화사(龍華寺)는 속칭 ‘걸미산 미륵당’이라 불린다. 용화사(龍華寺)는 1959년에 비구니 한자심이 신축한 절이다. 본래 고려시대의 절터로서 현재 거대한 석조미륵불입상이 남아 있다. 주변에서 석조여래입상이 발견되어 진천문화원으로 이전하였다가 최근 다시 경내로 이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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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에 있는 고려 후기 궁터.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궁골은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황제의 황후였던 오씨(吳氏)의 출생지라고 한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진천군 고적조에 의하면, 원황후궁 터는 원나라 황후 오씨가 자신의 부모를 위해 궁골에 지어 주었다는 궁터를 말한다. 그러나 학술적인 조사가 진행되지 못해 정확한 실체는 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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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가헌(可軒). 할아버지는 만오공 이후연(李厚淵)이다. 이석하(李錫夏)는 18세 되던 해 할아버지 이후연의 뜻에 따라 청야(青野) 임익상(林翼常)의 문하에 들어갔다. 공부를 하면서 책에서 본 것이나 실제로 본 좋은 행동을 실천에 옮기려고 애썼으며, 선행이나 좋은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어진 일을 하는 데 전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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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시 충청북도 진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본관은 양성(陽城). 호는 회헌(晦軒). 이정영(李廷英)[?~1592]은 1592년(선조 25) 음죽현감으로 재직 중에 임진왜란을 맞았다. 4월 일본이 15만 8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침범해 왔다. 왜군은 조총을 가지고 북상하며 4월 24일 상주에서 이일의 군을 격파하고, 16일에는 조령을 넘어 이튿날 충주로 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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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학자이자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만오(晩悟).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으로, 졸옹(拙翁) 이호중(李昊中)의 중손(中孫)이다. 이후연(李厚淵)은 신와 정재경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학문의 중심점을 캐어서 연구하였고 지식과 견문이 넓었다. 보고 들은 것이 많고 깨달은 바도 투철하여 정재경이 큰일을 맡을 만한 인물[大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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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고성(固城). 행원(杏園) 이부(李阜)의 6세손이다.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던 이희(李熺)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근동에서 효자라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가난한 생활을 하였어도 부모가 좋아하는 음식을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며, 항상 부모의 모든 것을 친히 보살폈다. 부모의 상을 당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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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또는 상산(常山)]. 슬하에 가문의 쌍효(雙孝)라 불리는 임호철(林昊喆)과 임우철(林禹喆) 형제를 두었다. 임광언(林光彦)[1794~?]은 어렸을 때부터 단정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침착하고 무게가 있었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등 남다른 점이 있었다. 9세 때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자 발을 구르며 통곡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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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 또는 상산(常山). 아버지는 효자 임광언(林光彦)이며, 임호철(林昊喆)의 동생이다. 임우철(林禹喆)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였다. 어버이를 모시는 데 형 임호철과 더불어 지극하여 조금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부모님을 섬기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상을 당해서는 예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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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이자 학자.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공실(公實), 호는 신와(愼窩).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8세손으로 아버지는 누항(陋巷) 정용환(鄭龍煥)이며, 조암(照庵) 정해필(鄭海弼)과 『상산지(常山誌)』를 쓴 정우섭(鄭友燮)이 그의 손자이다. 정재경(鄭在褧)[1780~?]의 아버지가 그림 속 용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꾸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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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회촌(晦村). 조선의 개국공신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의 7세손이며, 남대(南臺) 집의(執義) 정흠(鄭欽)의 현손이며, 입향조인 정방광(鄭邦絖)의 증손이다. 형은 정봉남(鄭鳳男)이다. 정황남(鄭凰男)은 백원서원(百源書院)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이 뛰어났다. 임진왜란 때 형 정봉남과 함께 어머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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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성석리에 있는 삼국시대 토축 산성. 진천 대모산성은 616년(진평왕 38)에 백제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모산성(母山城)으로 비정하려는 설이 있으나 대모산성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의 지리지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일제강점기의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상산지(常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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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학자.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군범(君範), 호는 봉암(鳳巖). 할아버지는 삼환재(三患齋) 채지홍(蔡之洪)[1683~1741]으로,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봉암마을에서 태어났다. 인천채씨(仁川蔡氏) 시조 채선무(蔡先茂)는 고려 중엽 벼슬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에 이르렀는데 인천에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인천을 관향으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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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1343~1413]의 여섯째 아들이다. 최유경은 1406년(태종 6) 참찬의정부사가 된 뒤 사임하고 진천군 초평면 죽정마을로 내려와 스스로 죽정(竹亭)이라 부르며 한가로이 여생을 보냈다. 최사흥(崔士興)은 효성이 지극하여, 충청도 대흥현감무로 있을 때 부친상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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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할아버지는 최기(崔基)이다. 최주민(崔柱旻)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작은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모셨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어 완쾌하게 하였고, 손수 약맛을 보아 봉양하였다. 숙종(肅宗) 때 정려가 내려졌다. 최주민의 할아버지 최기, 고조할아버지 최덕순, 증조할아버지 최사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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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열녀. 본관은 평산(平山). 남편 최혼(崔焜)은 지사(知事) 최극성(崔克誠)의 손자로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신씨는 남편 최혼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는 등 병간호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결국 남편이 죽자 만 1년 뒤 기제사를 마친 후 곡기를 끊고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1699년(숙종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