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 전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498
한자 胎峯傳說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기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7년 - 「태봉 전설」 전라남도에서 간행한 『명소지명유래지』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0년 - 「태봉 전설」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태봉」으로 수록
관련 지명 태봉산 -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지도보기
성격 설화|지명전설
모티프 유형 지명 유래|풍수 설화|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태봉(胎峯)에 관한 이야기.

[개설]

광주광역시에 신안동학운동에 2개의 태봉이 있었다. 그중 신안동 태봉에 관한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1987년에 전라남도에서 간행한 『명소지명유래지』에 수록되어 있다.

1990년에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태봉(胎峯)」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

광주광역시에는 신안동학운동에 2개의 태봉이 있었다. 학운동의 태봉은 증심사 입구의 배고픈 다리 남쪽에 있었는데 태봉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신안동의 태봉은 1967년에 헐렸고, 그 흙은 경양방죽을 매립하는 데 사용되었다.

신안동의 태봉은 1624년에 인조(仁祖)[재위 1623~1649]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갔을 때 낳은 왕자의 태를 묻어 태봉(胎峯)이라 부른 높이 30m의 낮은 야산이다. 신안동 태봉에 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왕후가 왕자를 낳자 계룡산에 태를 묻었다. 그런데 왕자가 병을 앓자, 불공을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도승이 찾아와 왕자의 병을 고칠 방법을 알려 주었다. 왕자의 태를 묻은 곳이 좋지 않으니, 전라도 광주에 가서 여의주 형국의 좋은 터에 금과 함께 옮겨 묻으라는 것이었다. 왕후는 아이가 태어난 지 반 년 만에 왕자의 태를 옮겼다. 그랬더니 왕자가 건강하게 잘 자랐다.

태항아리는 1928년에 발굴되었다. 광주에 가뭄이 극심한 이유가 태봉산에 암장묘가 많기 때문이라는 마을 주민들의 주장에 따라 암장묘를 찾다가 태항아리를 발굴하게 되었다. 그래서 태봉산이 지역 구획정리로 헐리게 되자 마을의 노인들은 태봉산을 허물면 광주가 망할 것이라 하였다. 태봉산이 논란의 중심이 된 연유는 여의주 형국이라는 풍수설 때문이었다. 무등산깃대봉을 거쳐 지산동으로 흘러내린 산맥이 용이 되지 못한 붉은 이무기이고, 조선대학교 뒤쪽이 이무기의 머리에 해당한다. 그리고 태봉이 여의주의 형국이라서 이무기가 여의주를 물고 용이 되어서 광주가 큰 고을이 될 수 있었다고 여긴다.

이때 발굴된 돌로 된 태실 안에는 백자 태항아리와 명기석반(銘記石盤), 그리고 금박(金箔)이 함께 발굴되었다. 이 유물들 중 태실은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으며, 백자 태항아리와 명기석반, 금박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모티프 분석]

「태봉 전설」의 주요 모티프는 ‘명당 얻기’이다. 광주광역시 신안동 태봉은 인조의 왕자 태를 묻은 작은 산이다. 왕자가 태어나면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며 태를 묻을 자리를 찾게 된다. 여의주 형국이라는 광주의 태봉산에 왕자의 태를 묻었고, 왕자는 건강하게 자랐다. 풍수 전설에서 여의주 형국의 태봉은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며, 광주를 발전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여의주 형국의 태봉산이라는 명당이 개인적으로는 왕자의 병을 치료하고, 지역적으로는 고을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상징이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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