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048
한자 住生活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혜숙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주거 형태나 생활에 관한 개관.

[개설]

서울특별시 동작구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주택의 형태가 등장하였다가 소멸한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동작구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은 가옥의 규모나 수준은 달랐지만 초가집 또는 기와집과 같은 한옥에 살았다.

[일제 강점기 동작 지역의 주생활]

일제 강점기에는 대부분의 조선인은 한옥이나 개량한옥, 토담에 엉성한 지붕을 올린 움막 형태의 토막(土幕) 등에서, 일본인은 일본식 가옥이나 양옥 등에서 거주하였다. 이 가운데 이전과 다른 변화로 들 수 있는 것이 문화주택, 영단주택, 개량한옥의 등장이다.

문화주택은 동작구 흑석동명수대에 주로 건립된 서양식 가옥이다. 명수대는 1930년을 전후하여 기노시타 사카에[목하영(木下榮)][1887~?]라는 일본인 사업가가 조선 제일의 모범문화촌을 꿈꾸며 흑석동에 개발한 30만 평 규모의 주택지인데, 당시 서울에는 교외 지역의 개발 붐이 불고 있었다. 총 5차에 걸친 명수대주택지의 분양 중 1차와 2차 분양지에는 정원이 딸린 서양식 외관의 최신식 고급 주택이 ‘문화주택(文化住宅)’이라 하여 다수 건축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부터 영등포 공업단지와 인접한 흑석동에 노동계층의 조선인 유입이 급증하면서, 명수대 개발지역에도 불량주택이 들어섰다.

명수대주택지와 달리 부지 조성만이 아니라 대규모 주택단지 건설까지 진행된 동작구 내 지역으로는 영등포 공업단지의 배후 주거지였던 상도동대방동이 있다. 주택난을 해결할 목적으로 1941년 7월 설립한 조선주택영단이 1941년 10월부터 1942년 9월까지 처음으로 진행한 사업의 결과가 바로 상도동대방동의 ‘영단주택(營團住宅)’이었다. 일본식 주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조선식이 가미된 영단주택은 표준설계도를 가지고 짓는 단독주택과 연립주택이 있었다. 총 464호의 영단주택이 건립된 대방동에는 갑형, 을형, 병형, 정형, 무형의 5가지 기본형이 모두 지어져, 다양한 계층의 거주자가 입주하였다. 상도동 영단주택지는 139,722㎡로 전국 최대 규모였고,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총 1,067호의 영단주택이 지어졌다. 대방동과 달리 도시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고급주택지를 지향했던 상도동에는 비교적 큰 평형의 영단주택이 다수 지어졌다.

영단주택보다 조금 이른 1930년대 후반부터는 흑석동 일대에 소위 ‘개량한옥(改良韓屋)’이 집중적으로 들어섰다. 기존의 전통한옥을 집장사들이 도시형 한옥으로 변형시킨 개량한옥은 대형필지에 일정한 규격으로 대량으로 지어 판매되었는데, 흑석동 도시형 한옥은 대개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 문간채가 결합된 ‘ㄷ’자형 공간구성을 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동작 지역의 주생활 변천]

광복 후 서울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동작구에도 인구가 더욱 증가하였고 주택 부족이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동작구에는 가옥의 신축이 이어졌는데, 이 시기에는 한옥보다는 양옥의 비중이 늘었다. 특히 6·25전쟁 이후에는 각종 원조로 다수의 주택이 건축된 바 있다. 노량진1동의 시영주택은 ICA[국제협동조합연합회]의 원조를 받았고, 1958년 9월 준공된 노량진 57번지의 국립서울모자원의 집합주택은 운크라[UNKRA], 즉 국제연합한국재건단의 원조로 지어졌다.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은 여성과 그 자녀가 거주하던 주택은 여러 개의 단칸방이 연결된 모양이어서 ‘말의 집’[마굿간] 같다고 하여 말집이라고 불렸다. 이후 모자원에서 기술을 배워 독립한 사람들을 위해 국립서울모자원에서는 1959년 영등포구 노량진동 산12번지에 연립주택을 건설하였고, 영등포구 신대방동 343번지 일대에도 이승만 대통령 때 전재미망인과 그 자녀를 위해 지은 64가구의 주택이 있었다.

한편 1950년대 이후, 동작구에는 사당동 22번지 일대의 가마니촌을 비롯하여 원조 없이 무허가로 지은 판잣집이 계속 들어섰다. 그 중 대표적인 주택이 ‘루핑집’이다. 1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루핑집은 루핑이라는 검은색 유지(油紙)로 지붕을 덮은 집을 가리키는데, 대부분 판자나 흙벽돌로 단칸방에 부엌 하나 또는 ‘ㄱ’자 모양의 무허가 불량주택이었다. 주로 흑석동, 노량진, 사당동 등에 1960년대까지 많았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영향을 받아 점차 기와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대체되었다.

불량주택이 증가하는 한편으로 1960년대 상도동에는 김영삼대통령 가옥에서 보듯이 2층 양옥이 들어선 고급주택가가 형성되었고, 1963년 동작구 상도동 356번지 일대에는 서울시가 직접 시영주택 100호를 건축하여 분양하기도 했다. 상도동 시영주택은 당시 경쟁률이 28 대 1에 달할 정도로 매우 인기가 높았다.

1970년대 동작구에는 강남물산이 1970년 건설한 상도동의 강남아파트[1, 2층은 상가, 3~6층은 아파트], 1976년 준공된 흑석동명수대아파트[1, 2층은 상가, 3~5층은 아파트]와 같이 상가와 주거시설이 결합된 상가아파트가 등장했다. 상가아파트는 주택난 타개와 도시 미관의 개선을 도모하며 1960~1970년대 서울에서 30여 곳이 지어졌는데,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주거시설이라 할 수 있었다. 상가아파트 이외에 동작구에서 1973년 대방동의 주공아파트를 비롯하여 일반아파트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도 1970년대였다.

일반아파트의 보급이 증가한 데는 1980년대 후반부터 흑석동, 노량진동, 사당동, 상도동 등의 불량무허가 주택지구의 재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이 영향을 미쳤다. 『제22회 1982년 서울통계연보』에 따르면, 1981년 기준으로 동작구의 정상주택 수가 44,796채인 반면 불량주택 수는 10,854채에 달해 4채 중 1채가 불량주택인 상황이었다. 아파트와 연립주택 등이 점차 신축되는 가운데 1991년 당시 동작구의 주택 구성을 보면, 전체 주택 72,211채 가운데 단독주택이 48,585채[67.28%], 아파트 9,318채[12.90%], 연립주택이 8,989채[12.45%], 무허가건물이 5,319채[7.37%]였다. 단독주택의 비중이 현저히 높으나 점차 아파트와 연립주택 등의 공동주택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였다.

그러다 아파트에 대한 선호도가 더욱 높아지고 1990년대 이후 다세대주택이 허용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2019년 통계연보에 따르면, 현재 동작구에는 단독주택 14,889채[13.3%], 아파트 59,188채[52.8%], 연립주택 5,152채[4.6%], 다세대주택 31,713채[28.3%], 비거주용 건물내 주택이 1,090채[0.97%]였다. 단독주택의 비중이 현저하게 줄고 아파트가 전체 주택의 50%를 넘었으며 다세대주택의 비중도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동작구 주생활의 특징으로 하숙집과 고시원이 밀집한 대학가와 노량진 학원가를 들 수 있다. 동작구는 흑석동중앙대학교, 상도동숭실대학교, 사당동총신대학교, 노량진 학원가 등이 위치하여 대학생과 수험생이 다수 밀집한 지역이어서, 이들을 상대로 하숙, 공부방, 원룸, 고시원, 고시텔 등 다양한 주거 형태가 발달해 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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