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536
한자 扶餘 亭岩里 瓦窯址
영어공식명칭 Roof Tile Kiln Site in Jeongam-ri, Buyeo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정암리 47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김성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8년 - 부여 정암리 와요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1차 발굴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0년 - 부여 정암리 와요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2차 발굴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1년 - 부여 정암리 와요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3차 발굴 조사
문화재 지정 일시 1992년 5월 4일연표보기 - 부여 정암리 와요지 사적 제373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부여 정암리 와요지 사적으로 변경 지정
소재지 부여 정암리 와요지 -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정암리 47 지도보기
성격 기와 가마터
지정 면적 78,793㎡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정암리에 있는 백제 시대의 기와 가마터.

[개설]

부여 정암리 와요지는 백제 사비 시기에 수도와 주변의 주요 건물에 공급하는 기와를 구웠던 가마터이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3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를 하였으며, 출토 유물이나 기와 가마의 구조적 형식으로 볼 때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초에 조영된 와요지로 추정된다. 1992년도 5월 4일 사적 제37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사적으로 변경되었다.

[위치]

부여 정암리 와요지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정암리 47 일원에 있다. 부여 정암리 와요지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정암리 내동마을을 중심에 두고, 내동마을의 앞쪽인 북쪽을 제외한 동측·남측·서측에 모두 자리하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87년 여름 충청남도 부여군에 큰 폭우가 쏟아지면서 완만한 경사면에 자리한 밭의 토사가 휩쓸리면서 부여 정암리 와요지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후 주변의 토지 정지 작업과 지표 조사를 통하여 여러 곳의 백제 시대 와요지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부여 정암리 와요지는 A지구·B지구·C지구·D지구로 구분되는데, 1988년 국립부여박물관의 1차 조사를 통하여 A지구의 2기 중 1기가 발굴 조사되었고, 1990년 국립부여박물관의 2차 조사와 1991년 국립부여박물관의 3차 조사를 통하여 B지구의 10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A지구에서 확인된 1호는 단벽이 있는 지하식 평요로 배연공이 2개인 것이 특징이다. 출토 유물은 수키와, 암키와, 염화문 수막새, 치미, 무문전 등의 와전류와 함께 토기류가 확인되었으며, A지구 가마에서 제작된 기와들은 부여 군수리 사지동남리사지에 공급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B지구에서 확인된 가마 중 백제 사비 시기의 것으로 알려진 것은 8기로 지하식 평요가 54기, 지하식 등요가 3기이다. 지하식 평요 중에서 2호·3호·5호·6호 가마는 전체 구조가 확인되었는데, A-1호와 달리 배연공이 3개인 것이 특징이다. 지하식 등요인 7호·8호·9호 중 18호는 소성실이 계단식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9호는 무계단식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출토 유물은 A-1호와 별반 다르지 않으나, 상자형 전돌과 연목와가 출토된 것이 주목된다.

이 중 A지구의 A-1호와 B-1호, B-2호, B-3호, B-5호, B-6호, B-7호, B-8호, B-9호는 백제 시대 와요지로 보고 있다.

부여 정암리 와요지의 가마에서 출토된 기와들은 충청남도 부여군 지역에서 확인되는 백제 시대의 대표적 불교 사원인 부여 군수리 사지동남리사지, 그외에도 금성산 와적기단 건물지, 부여 관북리 유적 등에도 공급된 것으로 밝혀져 백제 시대 생산 및 공급 체제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부여 정암리 와요지는 백제 사비 시기 대단위 기와 생산 및 공급지로서 의의가 있으며, 평요 및 등요가 한 가마 유적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사비 시기 동안 지속적으로 조영된 점이 주목된다. 또한 생산된 기와가 백제 왕도인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 있는 부여 군수리 사지동남리사지 및 금성산 와적기단 건물지, 부여 관북리 유적 등에 공급되고 있는 점은 부여 정암리 와요지가 국가에 의하여 경영되었음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마지막으로 출토되는 유물이나 기와 가마의 구조적 형식으로 볼 때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초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어 백제 사비 시기 기와 가마를 연구하는 연구자들과 백제 기와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백제의 기와 가마사와 기와를 연구하는 데 있어 학술적으로 대단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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