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510
한자 扶餘 普光寺址 大普光禪寺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동남리 산16-1]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정규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285년 또는 1358년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건립 추정
보수|복원 시기/일시 1750년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비문 추가
문화재 지정 일시 1963년 1월 21일연표보기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보물 제107호 지정
이전 시기/일시 1963년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이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보물로 변경 지정
현 소재지 국립부여박물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동남리 산16-1]지도보기
원소재지 부여보광사지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가신리 지도보기
성격
관련 인물 원명국사
재질 편마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230㎝[높이]
소유자 국유
관리자 국립부여박물관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보광사 건립을 기념하며 세운 고려 후기 비석.

[개설]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扶餘 普光寺址 大普光禪寺碑)는 고려 시대에 건립된 사찰 보광사의 건립을 기념하며 세운 것이다. 고려 후기에 건립되었고, 이후 조선 후기 영조 대에 고쳐 세웠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0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보물로 변경되었다.

[건립 경위]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보광사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죽은 뒤 1358년(공민왕 7) 비석이 건립되었는 설과 1285년(충렬왕 11) 세워졌다는 설이 있다. 건립된 해에 앞면의 내용을 새겼고, 1750년(영조 26) 뒷면을 다시 새겼다.

[위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다. 원래는 임천면 가신리 부여보광사지에 있었으나 1963년 보물로 지정되면서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형태]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는 비석 받침과 비 머릿돌은 없는 상황이고 비신(碑身)만 존재한다. 비신 윗면의 양 모서리에 귀접이를 하고 앞면 가장자리에는 당초문(唐草文)을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재질은 편마암이며, 높이는 230㎝이다. 외부에 비각(碑閣)이 있어서 비석을 보호하고 있다.

[금석문]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는 크게 3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보광사와 관련된 내용이다. 원명국사보광사를 하산소로 정하였고, 원명국사보광사로 내려오면서 많은 문인들이 보광사로 오게 되었다. 문인들이 3,000명이나 되어서 수용이 어려워서 중창을 시작하였다. 이때 보광사를 중창하는데 원명국사의 형 김영인(金永仁)과 김영순(金永純)이 가동(家童) 100구와 전(田) 100경(頃)을 시주하였다. 아울러 원명국사의 형제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시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원명국사보광사에서 입적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두 번째는 원명국사의 생애와 행적에 관련된 내용이다. 원명국사의 이름은 충감(沖鑑), 자는 절조(絶照), 별호는 설봉(雪峰)이고, 선원사에서 출가하여 자오국사(慈悟國師)를 스승으로 삼고, 19세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고 선원사에서 15년 동안 주지를 역임하면서 불교를 선양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 1336년 보광사로 오게 되었고 4년 뒤인 1340년 열반에 들었다. 세 번째는 조선 시대에 보광사가 중창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는 고려 후기 간략화된 사찰 비석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고려 후기 불교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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