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018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성태

[정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 전래된 기독교의 역사와 전개 양상.

[개설]

그리스도교는 우리나라의 근대화의 바탕이 되었다. 18세기 말 최초의 그리스도교가 천주교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신생 천주교는 입교자가 늘어나면서 반상과 남녀의 구별을 분명히 하였던 기존의 신분 질서를 위협하는 한편, 제사를 폐지한다거나 불합리한 인습을 타파하는 등 국가 지도층에게는 충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한편, 근대적 교육과 사회 복지의 시행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신선한 파급력으로 다가왔다. 결과적으로 천주교는 전통의 해체와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사교로 규정되어 대대적인 박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천주교 신앙은 급속도로 확산되고, 교리 교육과 기도 운동의 방안으로 한글 보급에 앞장섰고, 한글 보급과 함께 기독교 문화가 암암리에 이식되었다. 천주교를 통한 근대적 사고방식과 진보는 오지로 인식된 부여 지역에도 영향을 끼쳐 지역민으로 하여금 근대적 삶의 양식을 수용하도록 만들었다.

근대화의 씨앗은 개항기 이후 미국을 비롯한 개신교 선교단의 적극적인 전도 활동에 힘입어 우리나라 전반에 뿌리 내리고 열매를 맺게 되었다. 개신교단은 감리교와 장로교를 필두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노력에 힘입어 본격적인 근대식 학교와 의료 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인식의 지평을 넓혀 더욱 적극적으로 근대 시민으로서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신분 제도와 차별을 종식시키고, 개인의 생명을 중시하는 등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를 향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부여 지역에서도 근대적 사고를 먼저 섭렵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마을이나 신앙 공동체의 의식을 개선하고, 근대적 가치에 입각한 근대적 삶의 형태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개신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부여를 관통하는 금강은 개신교 신앙이 뿌려지고 정착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물리적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핍박에서 피어난 부여 지역 가톨릭의 열매]

1. 스스로 깨달은 신앙의 진리

우리나라 그리스도교의 본격적인 신앙 운동은 가톨릭교회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 후기 진보적인 유학자들 가운데는 이른바 ‘서학’에 큰 관심을 보이며 서양의 사상과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이들이 있었다. 학자들은 서학서들을 통하여 예수의 가르침과 신앙 교리를 습득하고 신앙으로 승화시켰다. 선교사 없이 신앙의 진리를 스스로 깨우친 사건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희귀한 일이었다.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서울로 돌아온 이승훈은 동료 학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천주 하느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전례 의식을 행하였다. 한국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창설된 것이다. 이승훈 등은 지속적으로 모여 정기적인 신앙 집회를 여는 한편, 각자의 연고지를 기반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갔다.

충청도 지역에서는 노비 출신의 이존창 루도비코와 양반 가문의 학자 홍낙민 루카가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면서 주변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내포 지방에서는 집단적인 입교가 이루어졌고, 충청도 지역에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2. 충청도 기독교 전파의 발판, 부여

‘사학의 교주’로 지목된 이존창은 1791년 신해박해의 여파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1791년 12월 30일 자신의 활동지였던 충청도 예산군 여사울을 떠나 부여군 홍산으로 이주하였다. 이존창의 이주로 부여 지역은 충청도 천주교회의 또 다른 거점이 되었다.

홍산에서는 최여겸, 고윤득, 황심, 황일광, 김유산 등이 이존창에 의하여 입교하였다. 입교자들은 다시 충청도는 물론 전라도 지역과 인근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천주교 신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홍산에서 입교한 황심과 김유산 등은 중국을 오가며 국내 공동체와 북경교회 사이의 연락책으로 활동하며 양국의 교회 간에 긴밀한 유대를 이루는 데 기여하였다.

충청도 복음 전파의 중심에 섰던 이존창은 ‘홍산’ 시기를 마무리하고 전라도와 그 밖의 지방으로 옮겨 다녔으나, 조정의 끊임없는 감시로 체포와 옥고를 반복해서 치르다가 1801년 이른바 신유박해 때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이로써 길고도 혹독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866년에 발발한 병인박해가 종식될 때까지 100년의 시간을 견디어 내며 신앙을 더욱 공고하게 다져 나갔다.

3. 핍박 속에 피어난 복음의 터전

박해가 진행되는 중에도 홍산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기회가 되면 기꺼이 순교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앙 공동체를 더욱 확대하여 갔다.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73년 병인박해의 말기까지 부여 지역에 산재하였던 신앙 공동체는 기록을 토대로 확인할 수 있다. 기록에 나타난 주요 공동체로는 외산면의 거칠, 옥가실, 방고개, 구신리, 내대에 공동체가 있었다. 내산면 금지리 뒤웅골과 도앙골도 등장하는데, 도앙골은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가 귀국 후 처음으로 사목 서한을 작성한 곳이다. 홍산면 상천리 삽티는 순교 성인 황석두 루카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옥산면의 부덕과 순교 성인 손선지 베드로와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의 고향인 충화면 지석리도 교우들이 모여 살던 터전으로 파악되고 있다.

4. 순교의 핏값으로 피어난 열매

박해 이후 신앙의 자유가 찾아오고, 숨었던 교우들은 다시 모여들어 신앙 공동체를 재건하여 갔다. 은산면내산면, 외산면의 산지와 구룡면에서는 흩어진 신자들이 다시 모여드는 한편 큰 공소들이 세워졌다.

1901년 4월 27일 처음으로 세워진 금사리성당에는 정식으로 신부가 파견되었다. 이제는 숨거나 피하지 않고 떳떳하게 복음을 전하고, 온전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새 신자들도 점차 늘어나고 주변 공소의 신자들을 사목적으로 돌볼 수 있도록 홍산, 규암, 부여에 차례로 성당이 세워졌다. 이와 함께 부여 지역 출신이거나 깊이 연관을 맺고 있던 순교자들이 교황청에 의하여 성인(聖人)이나 복자(福者)로 선포되어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천주교 당국에서는 손선지와 정문호 두 성인의 출신지인 지석리를 성지로 선포하였고 삽티, 도앙골 등 선조 신앙인들의 자취들은 서천과 보령 지역의 순교 유적과 함께 ‘하부내포성지’로 지정하여 순례자를 맞이하고 있다.

한편 부여 지역의 천주교는 박해기부터 상속된 신앙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시대의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해외 원조를 유치하여 병원을 설립하기도 하였고 전쟁 직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구제 활동과 하천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 공사를 가톨릭구제회의 도움으로 시행한 바 있다.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의 신앙 행위는 삶의 모든 분야를 통해 드러나고 재현되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통로, 금강과 부여]

1. 한국 최초의 개신교 전래, 감리교

미국의 북감리교 선교 본부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매클레이(R. S. Maclay) 목사를 한국으로 보냈다. 한국에서 선교 활동이 가능한지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1884년 6월 24일 내한한 매클레이는 김옥균의 주선으로 7월 3일에 고종을 만났다. 고종을 만난 자리에서 매클레이는 미국 북감리교가 한국에서 병원과 교육 사업을 시작하여도 좋다는 허가를 임금에게서 받아냈다. 직접적인 전도 활동 허가는 아니었지만 교육과 의료를 통한 간접 선교와 백성들에 대한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매클레이 목사의 고종 알현과 병원과 교육 사업의 허가는 한국 개신교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이후 매클레이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885년 4월 5일과 5월 3일에 각각 입국한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스크랜튼(W. B. Scranton)이 활동하는 동안 매클레이는 한국 선교 지방 감리사로서 한국에 복음을 전도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2. 언더우드와 장로교 전도

아펜젤러의 입국일이었던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의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도 함께 입국하였다. 우리나라 장로교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언더우드는 1887년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창립한 인물이고,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경신학교와 세브란스병원의 설립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처럼 한국 개신교의 시작이자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감리교와 장로교는 처음부터 교육과 의료 시혜를 통하여 한국의 근대적 의식 성장에 영향을 주었고, 이를 기반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큰 성장을 이루었다.

3. 충청도에서 시작된 한국 침례교

감리교와 장로교가 한국 개신교의 문을 열었다면 또 다른 방식의 전도 활동으로 한국 개신교회의 특성을 형성하여 간 교단들도 있다. 초기 교단들 가운데 침례교의 활동도 두드러진다.

한국 침례교 신앙의 전파에는 1895년에 미국에서 설립된 엘라싱기념선교회가 큰 영향을 주었다. 엘라싱기념선교회는 의료나 교육을 이용한 간접적 선교 방식 대신에 복음주의에 입각한 직접적인 신앙 전도를 지향하였다. 나아가 선교 단체들이 이미 활동하는 지역을 피하여 오지 선교와 초교파(超敎派) 선교를 강조하였다. 선교회의 이러한 특징들은 충청도 지역에 침례교 선교가 적극적인 진전을 이루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엘라싱선교회에서 파견한 폴링(E. C. Pauling) 목사가 1895년 3월 내한하여 선교 지부를 구축하였다. 폴링은 앞선 교단의 선교 단체가 진출하지 못한 충청도를 선교 구역으로 설정하고, 1896년 강경과 칠산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를 발판으로 삼아 여전히 선교의 오지로 남아 있는 충청도와 인근에 대한 직접적인 선교를 전개하고자 하였다.

4. 오직 전도, 성결교

부여 지역과 관련하여 한국 개신교 초기 선교에서 주목해야 할 교단은 성결교이다. 감리교와 장로교, 침례교에 비하여 뒤늦게 한국 전도에 뛰어든 성결교회는 독특한 선교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중 복음 교리를 기반으로, 교회 조직이나 교파의 설립보다 ‘오직 전도’라는 모토를 자산들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었다. 동양선교회는 성결교의 복음 교리를 전도하겠다는 목적을 설립된 해외 선교단체였다.

동양선교회는 복음이 전파된 지역에 교회가 아니라 복음전도관을 세우고, 복음과 교리를 선포하고 전도 활동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성결교 기관은 1907년 5월 30일에 경성에 설립된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다.

부여 지역 성결교회의 시작은 1912년 규암에 세워진 규암복음전도관이다. 규암복음전도관은 한강 이남 지역 최초의 성결교회가 되었다. 이어 1914년에 은산, 1915년에는 홍산에도 복음전도관을 세워 선교를 시작하였다. 복음전도관은 한국 성결교회 선교의 발판이 되었다. 복음전도관은 1921년에 들어서서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무교정성결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점차 성결교회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5. 기독교 신앙의 통로, 금강

감리교와 장로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설립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음에도 부여 지역은 이들 교단에 앞서 침례교 전도가 가장 먼저 이루어졌다. 충청도 선교를 결단한 폴링에게 금강은 매우 중요한 전도의 수단이었다. 이른바 금강 주변 순회 전도를 통하여 충청도와 전라도로 연결되는 복음 전도 루트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강경에 처음으로 침례교회가 세워지고, 이어서 금강 수계를 따라 임천에 복음이 전하여졌다. 장로교회 역시 초왕리교회[현 오량교회] 이후로 금강 변의 포구를 따라 여러 교회들이 분립되었다. 감리교의 충청도 선교의 주요 거점 역시 공주-강경-규암을 축으로 한 금강이었다. 크고 작은 포구와 도시가 조성되어 있던 군산, 서천, 임천, 양화, 강경, 논산, 규암, 공주 등이 충청도 교회의 초석이 되고, 전국 확산의 교두보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금강금강을 통하여 오가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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